2023. 6. 5. 22:21ㆍ영화 파노라마
문과 성향인 나는 수학을 좋아하지 않으며 수리에 기반을 둔 경제도 껄끄럽다. 경제 분야가 생활과 밀접하기 때문에 외면하며 살지는 않으나 경제 현상을 수리적으로 풀어서 설명하려는 단계에 이를 때면 고개를 돌리는 식이다. 그러니 '빅 쇼트'같은 경제 붕괴 사태를 다룬 영화는 선뜻 선택하지 않게 된다. 이 영화가 호평을 받았고 좋은 영화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동안 보지 않았던 것도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무너진 미국 주택시장 문제 라는 경제 분야가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 영화를 보고나서 나의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빅쇼트'는 주택 모기지론을 기반으로 한 채권 상품의 부실을 아무도 감지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제대로 짚어낸 금융계 이단아들의 인상적인 성공을 다룬다. 또 미국 금융 시스템을 매섭게 비판하고 통렬하게 펀치를 날린다 . 한 발 더 나아가 주택시장 붕괴로 큰 빚을 지고 집을 빼앗겼으며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낸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매우 흥미롭고 통쾌하면서도 따뜻한 배려를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 맥케이 감독의 탁월한 연출과 크리스찬 베일, 스티븐 카렐, 라이언 고슬링, 그리고 브래드 피트 등 배우들의 감탄스런 연기가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실화에 바탕한 영화로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다.
2005년 3월, 캘리포니아의 메트로 캐피탈이라는 투자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마이클 버리(크리스찬 베일)는 모기지채권을 분석한 결과 부실의 덫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한다. 모기지 채권은 주택저당증권 등을 기반으로 한 금융 상품으로 주택 구입자가 대출금을 갚지 않을 일은 없기 때문에 매우 안정된 상품이라고 평가받았다. 대다수 금융계 종사자들이 모기지 채권의 안정성은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버리는 주택자금 연체 건수가 늘고 있는 세부 자료 내용을 흘려보지 않았다. 그는 로렌스 필드(트레이시 레츠) 회장에게 전화해 모기지 채권이 하락하면 수익을 얻는 공매도에 나서겠다고 말한다.
로렌스는 버리가 시장과 수치를 기반으로 투자 결정을 내릴 때마다 큰 수익을 안겨줬기에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으나 미심쩍어했다. 주택시장과 관련 금융 상품은 워낙 튼튼한데 그 반대 방향으로 투자하겠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버리의 천재적 감각을 믿기에 뭐라고 하지 못했다. 버리는 괴팍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리는 인물이다. 그는 어릴 적 미식축구 시합에서 눈을 다쳐 한쪽 눈을 의안으로 했고 이후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됐다. 그는 데이팅앱을 통해 자신을 의안을 한 비사교적인 인물이라고 소개했는데 그의 솔직함을 마음에 들어한 여성과 결혼해 가족을 아끼며 살아간다. 사무실에서 반바지를 입고 하드 록 음악을 들으며 일하는 버리는 수치와 분석에 특출나게 밝은데 자신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버리는 뉴욕 월가의 골드만삭스로 가서 모기지 채권이 부도가 날 경우 수익을 얻는 신용부도스와프 상품을 만들면 투자하겠다고 제안한다. 골드만 삭스 담당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500만 달러의 투자를 받겠다고 하자 버리는 1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한다. 골드만 삭스 담당자들은 투자 액수에 놀라지만 곧 합의하고 버리가 사무실을 떠나자 웬 바보가 횡재를 안겨 줬다며 크게 좋아한다. 버리는 도이체 방크에 들러 같은 상품에 2억 달러를 투자하고 이어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다른 은행과 금융 회사에 들러 모두 13억 달러 라는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는 계약에 서명한다.
이 소식은 곧 월가에 퍼지고 도이체 방크의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도 알게 된다. 자레드 베넷은 버리와 같은 판단으로 모기지론 하락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월가에서는 그의 의견을 못 들은 척하고 무시해왔다. 베넷은 버리의 투자 소식에 자신의 판단이 맞다고 더욱 확신한다. 한편, 마크 버움(스티브 카렐)이 운영하는 투자회사에 한 통의 잘못 걸려온 전화가 사무실을 들쑤셔 놓는다. 베넷의 부하 직원이 거래하는 투자 회사에 모기지채권을 공매도하라고 전화한다는 것이 상호가 비슷한 버움의 회사에 잘못 전화했던 것. 이에 버움은 베넷을 만나 신용부도스와프 투자에 대한 설명을 듣고 투자하기로 한다.
콜로라도의 젊은 투자자 찰리 젤리와 제이미 시플리도 우연히 베넷의 투자 설명서를 입수해 내용을 읽어본 뒤 투자하기로 한다. 그들은 모건 스탠리에 찾아가 투자 계획을 설명하려 하지만 담당자는 이들을 사무실도 아닌 로비에서 만나 투자금이 너무 적다며 무시한다. 그들은 로비 의자에 나뒹굴던 베넷의 설명서를 읽고 투자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멘토인 벤 리커트(브래드 피트)에게 조언을 구했고 벤이 내용을 검토한 후 투자할 만하다고 하자 기뻐한다. 벤은 월가에서 뛰어난 시장 분석가로 일하다 돈만 밝히는 풍토에 질려 뉴욕을 떠난 인물이다.
이들이 투자에 나선 후 시간이 흘러갔지만 모기지 채권의 안정세는 이어졌다. 버리는 투자 조건으로 모기지 채권이 오를 경우 매월 프리미엄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 투자 규모가 크기 때문에 프리미엄 대금 납부에 대한 압박이 쌓여가고 로렌스는 불안감에 버리에게 투자금을 걷어들여야 하지 않느냐며 다그친다. 2007년 들어 주택 대출 연체 규모가 커지고 주택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생겨나지만 모기지 채권에 대한 신용평가는 하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흐르자 마침내 모기지 채권의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하락 폭이 점점 더 커지며 시장에 충격파를 던진다. 신용부도스와프에 투자한 버리의 회사와 버움, 베넷 등이 모두 대박을 터뜨릴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마크 버움은 자신은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되지만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을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찰리와 제이미도 기뻐하다가 벤이 집을 잃게 되는 사람들을 떠올리라며 따끔하게 지적하자 입을 다문다.
아담 맥케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던 것 같다. 월가의 탐욕은 부실의 폭탄을 안은 쓰레기같은 금융 상품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 마구 판매했고 결국 시장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어려운 금융 용어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내용도 있는데 영화를 전개하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다. 시장의 붕괴를 내다본소수의 전문가들이 큰 수익을 얻는 과정은 영화적으로 흥미롭기 그지 없으나 주택 시장의 붕괴로 사람들의 삶이 붕괴되는 모습은 슬프다.
배우들의 연기는 모두 뛰어나며 특히 크리스찬 베일과 스티브 카렐의 연기가 반짝인다. 크리스찬 베일은 괴팍하며 비사교적인 마이클 버리 역을 탁월하게 표현하는데 그는 좀 독특한 인물을 연기할 때 특히 돋보이는 것 같다. 스티브 카렐은 다혈질적이고 신경질적이지만 마음이 바른 마크 버움 역할을 해내는데 그의 연기는 강렬한 임팩트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