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1. 21:46ㆍ영화 파노라마
DJ 배철수가 팝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경이로움을 오래 전 방송에서 털어놓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칠순을 넘긴 배철수는 자신이 중학생이었을 때 'Sealed with a Kiss'(키스로 봉한 편지)라는 노래를 듣고 '아, 이런 음악이 있다니!'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1962년, 브라이언 하이랜드 라는 가수가 불러 크게 인기를 얻은 이 노래는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가요와는 너무 달랐기에 음악을 좋아하는 배철수 소년에게는 더없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는 영화 '대부'를 보고 그런 느낌을 받았다. 중학생이었을 때 재개봉한 '대부'를 보고 '이런 멋진 영화가 있다니!'하는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더 어렸을 때도 영화를 많이 보았지만 '대부'는 당시의 우리나라 영화나 미국 등 외국 영화들과도 뭔가 비교 불가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오래 전에 인기 있었던 소설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주인공 정도는 아니지만, 할리우드 영화에 빠진 '할리우드 키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 좋은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우리나라 영화의 팬이기도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와 사랑에 빠졌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개 어린 시절에 어떤 특정한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 자체에 급격히 빠져 들거나 그 영화 속 멋진 배우를 좋아하게 된 경우가 있을 것이다. 특정한 영화가 아니더라도 영화들을 보다보니 영화를 좋아하게 될 수도 있겠다. 평소에 영화 볼 생각을 하지 않다가 여가가 나면 '영화나 보러 갈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자면 마치 첫사랑에 빠지듯이 뻔질나게 영화관을 찾거나 뜨뜨미지근한 사랑처럼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 '영화나 보러 갈까'하는 경우를 사랑에 빗대어 필요할 때만 찾는 자기중심적인 '나쁜 남자(여자)'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넷플릭스의 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영화, 보기의 미학'은 영화광들이 나와 영화에 대한 사랑과 영화의 매력들을 이야기한다. 여섯 편의 소품 에세이 같은 이 다큐의 첫 편에 사샤 스톤 이라는 여성은 자신이 영화와 사랑에 빠졌던 잊지 못할 순간을 회고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이던 1975년에 개봉한 '죠스'를 보고 영화를 너무 좋아하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평화로운 해변에서 따가운 햇살 아래 여가를 보내던 사람들이 상어의 출현에 놀라고 상어가 사람을 참혹하게 짓이기고 존 윌리엄스의 긴장된 음악에 가슴을 조리다가 마침내 상어를 제압하는 모든 장면들을 보고 보고 보고 또보고 또보고 또보았다고 했다. 사샤 스톤은 히피 공동체에서 생활하던 부모 그늘에서 여동생과 함께 '죠스'를 질리도록 여러 번 보면서 자신의 삶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짐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2편에서 토니 저우는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극을 새로운 차원에서 다룬 점에 강하게 매혹됐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는 복수에 나서는 금자(이영애)가 어린이들을 납치해 죽인 백선생(최민식)을 처단하기에 앞서 피해 어린이들의 부모들을 모아 그들이 어떻게 백선생을 처리할 것인지를 직접 토론해서 결정하도록 한다. 피해 부모들은 법의 처리에 맡길지, 직접 복수할지를 놓고 의견을 나눈 끝에 그들 스스로가 직접 복수하자고 결정한다. 토니 저우는 이러한 결말은 다른 복수 영화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라며 복수극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영화라고 평가한다. 또 복수를 다룬 영화들이 많은데 관객들이 복수극에 왜 열광하는지 분석해 본다.
이후에도 다른 흥미로운 내용들이 이어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좋아하지만 피터 오툴이 연기한 T.E. 로렌스는 좋아하지 않을 수 있듯이 관객들이 호감을 느끼거나 그렇지 않은 캐릭터들을 따져본다. 특히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사람들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훌륭한 작품을 만든 솜씨를 살펴본다.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버클(로버트 드니로), '성난 황소'의 제이크 라모타(로버트 드니로), '코미디의 왕'의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니로) 등은 하나같이 비사회적이고 편집증적이고 모순적인 인물들이지만, 이들은 뒤틀린 사회 속에서 눈쌀을 찌푸리는 짓들을 하면서도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월터 힐 감독의 히트작 '48시간'(1983년 개봉)에 대한 흥미로운 탐구도 있다. '48시간'은 탈옥범들을 잡으려는 형사 잭(닉 놀테)과 탈옥범들과 일한 적이 있어 잭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 죄수 레지(에디 머피)를 다룬 영화이다. 레지는 48시간 동안 한정적으로 가석방을 받아 잭의 일을 도와주면 6개월 후에 나갈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욕설과 인종차별을 영화 스토리를 펼치는 추동력으로 쓴다. 백인인 잭은 흑인인 레지에게 걸핏하면 검둥이라 부르며 욕설을 하고 레지는 이에 별 대응을 하지 않는다. 레지는 양복을 입고 잭의 형사 파트너처럼 일하지만 백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레지는 백인들이 우글거리는 클럽에서 그들 모두를 강한 기와 입담으로 눌러버린다. 뛰어난 액션 영화들을 만들었던 월터 힐 감독은 '48시간'을 통해 탁월한 액션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 이면의 민낯도 시원하게 까발린다.
10대와 20대 때는 달고 자극적인 음식들을 맛있어했던 입맛처럼 그저그런 영화들도 마냥 좋아라 했다. 오래전 동시상영관에서 삼류 중국 영화의 현란한 무술 동작을 넋놓고 감탄하며 지켜보았고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버닝', '여대생 기숙사'같은 공포 영화들을 아주 재밌어하며 봤던 기억도 떠오른다. 이후에 나이가 더 들고 영화들을 더 많이 보다보니 자연히 취향이 생기면서 무언가 정리가 됐고 내 방식에 따른, 좋아하는 영화와 뛰어난 영화들을 구분하게 됐다. 넷플릭스 시리즈 '영화, 보기의 미학'은 영화 매니아들에게 이렇듯 자신의 영화 사랑을 되돌아보게 하고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변함없이 사랑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