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3. 12:27ㆍ영화 파노라마
케네스 브래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배우인 것 같다. 그는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2017년 개봉)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과 연합군의 철수 작전을 이끄는 볼튼 사령관 역할을 맡았고 올 7월에 개봉하는 '오펜하이머'에도 출연한다. '덩케르크'는 배우들의 개성보다는 상황에 무게를 둔 영화여서 케네스 브래너가 돋보이지 않아도 되는 영화이지만 넷플릭스에 있는 '벨파스트'를 보고나니 '덩케르크'의 케네스 브래너가 떠올랐다. '벨파스트'는 케네스 브래너가 감독으로 만든 영화이고 매우 뛰어나다는 느낌을 안겨줬다.
'벨파스트'는 1969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의 서민 거주지역에서 사는 한 가족의 신산한 삶을 그린다. 가족의 막내 아들인 버디(주드 힐)의 눈으로 당시의 사람들과 불안정한 사회를 지켜본다. 그 무렵의 벨파스트는 개신교와 가톨릭 간 종교 갈등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벨파스트'에 나오는 종교 갈등에는 다른 이유도 얽혀 있다. 북아일랜드는 이남의 아일랜드와는 달리 영국령에 속했고 개신교측은 대체로 영국에 남아있기를 바랐던 반면 가톨릭 측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아일랜드와 통일되기를 원했다. 독립을 주장하는 측은 무장단체 IRA(Irish Republican Army)를 결성해 테러를 일으켰고 영국군과 무장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또 영국군에 의해 끔찍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벨파스트'는 종교적 갈등을 다루지만 민감한 사안인 정치적 충돌까지 드러내지는 않는다.
영화는 지금의 발전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색채의 벨파스트를 비추다가 어느 지역의 담을 넘어가면서 흑백으로 전환되고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시작된다. 1969년 8월15일, 벨파스트의 서민 거주지역. 연립 주택이 늘어서 있고 휴일을 맞은 동네 사람들은 집밖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공을 차거나 칼싸움을 하고 버디는 엄마(케이트리오나 발피)가 식사 시간에 맞추어 부르는 소리에 집으로 달려간다.
어린 버디는 적대적인 구호를 외치며 무리를 지어 행진하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고 멈춰선다. 잠시 후 행렬의 사람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가톨릭 신자들의 집과 가게에 불을 지른다. 개신교도인 이들은 가톨릭 신자들은 이 동네에서 살 수 없다고 외치고 뒤늦게 온 경찰과 동네 사람들이 현장을 수습한다. 버디네 집을 비롯해 동네 사람들은 불안해진다. 폭력 행동에 나선 개신교인들 중에는 동네 사람들도 있고 이 중 빌리 클린턴(콜린 모간)은 무리의 지도자로 버디의 아빠(제이미 도넌)에게 같이 하든지, 아니면 돈을 후원하라고 압박한다. 아빠는 가족을 다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응수한다.
개신교 신자인 버디네는 버디의 형 윌(루이스 맥아스키) 등 네 가족이며 동네에 할아버지(키어런 하인즈)와 할머니(주디 덴치), 이모네, 다른 친척들도 함께 살고 있다. 버디의 아빠는 영국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며 2주마다 귀가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버디와 윌을 돌보며 지낸다. 동네에서는 개신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 할 것 없이 서로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이웃 사촌으로 가깝게 지냈으나 폭동 사건 후 가톨릭 신자들이 떠나는 등 서먹하고 불안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버디는 친하게 지내는 동네 누나 모이라(라라 맥도넬)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며 빌리는 개신교 이름이고 패트릭은 가톨릭 이름이라는 등의 대화를 나누며 걱정한다.
동네 입구를 바리케이드로 막고 어수선한 가운데 일상은 다시 평화롭게 지나간다. 버디는 좋아하는 여자 아이 캐서린(올리브 테넌트)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 성적 순으로 앉는 점을 이용,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노력한다. 할아버지는 버디에게 헷갈리는 답은 숫자를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쓰면 다 맞게 해준다고 조언(?)했고 할머니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냐며 할아버지를 힐난한다. 아빠는 엄마에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호주로 이민을 가자고 했다가 이후에는 영국으로 이주하면 좋은 집을 제공받고 월급도 인상해 준다는 제안을 받았다며 의향을 묻는다. 엄마는 평생 여기에서 살았고 가족과 친구들도 다 여기에 있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영국에 가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말한다. 버디도 친구들과 떨어지기 싫다며 울음을 터뜨린다.
어느 날, 개신교들의 시위가 다시 발생하고 이들은 카톨릭 신자가 운영하는 마트에 쳐들어가 물건들을 가져간다. 버디는 모이라의 꼬임에 넘어가 세제 한 통을 들고 왔지만 엄마에게 호되게 혼나고 엄마와 함께 세제를 되돌려주러 간다. 이 곳에서 아빠와 만나게 되고 아빠는 자신을 다그치던 빌리와 만나 재차 입장을 정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한편, 버디와 친구처럼 지내던 할아버지는 폐암에 걸려 투병하다 숨진다. 가족들의 슬픔 속에 장례를 치르고 버디네는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버디네는 할머니, 친척들과 정든 이웃들을 뒤로하고 마침내 벨파스트를 떠난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히트작인 '토르:천둥의 신'(2011년 개봉)을 연출했고 그에 앞서 1990년대에 '환생', '헨리 5세', '헛소동', '프랑켄슈타인' 등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 무렵 배우로서도 자신이 만든 영화의 주연 등 많은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벨파스트'에서 버디의 엄마 역할로 나오는 케이트리오나 발피는 르네 젤웨거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배우로 '포드 V 페라리'에서 크리스천 베일의 아내 역으로,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아웃랜더'의 주인공 역할을 맡아 인기를 끌었다. 아빠 역의 제이미 도넌은 넷플릭스 시리즈 '더 폴'에서 냉혈적인 연쇄살인범 역할을 강렬하게 펼친 바 있다.
'벨파스트'는 폭력적이고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어린 버디도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따뜻한 부모와 가족의 사랑 속에서 밝게 커나간다. 이 영화는 혼란한 시대 속 어린 아이의 성장담으로 관객들에게 다양한 감정과 여운을 불러 일으킨다. 힘들었지만, 훈훈했던 과거에 대한 따뜻한 기억,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부모의 사랑, 신랄한 유머 속에 깃든 사람들 간의 끈끈한 유대 등.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나서 느꼈던 감정을 이 영화에서 다시 경험하는 것 같았다.
또 이 영화에는 좋은 장면들이 많은데 특히 후반부에 할아버지의 장례식 후 버디네 가족들이 이웃 조문객들과 함께 할아버지를 기리며 즐겁게 노는 장면이 뇌리에 남는다. 1960년대 그룹인 '더 러브 어페어'의 당시 히트곡 'Everlasting Love'가 흘러나오고 아빠가 노래를 부르자 엄마가 흥겹게 춤을 추는 장면이다. 버디와 할머니는 앉아서 이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삶은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주요 배역 중 주디 덴치를 제외한 대부분의 배우들이 북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특히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벨파스트 출신으로 이 영화는 그의 반자전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1960년생인 케네스 브래너는 영화 속 폭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버디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다. 그래서 '벨파스트'는 감독과 배우들이 북아일랜드와 벨파스트에 대한 애정을 가득 담아 그 시절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