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30. 22:24ㆍ영화 파노라마
숀 펜은 훌륭한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이다. 배우들 중 직접 연출에 나선 인물들이 있는데 이 중 배우 보다는 이제는 감독으로 굳어진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제외하고 숀 펜, 조지 클루니, 벤 애플렉, 조디 포스터 등은 웬만한 영화 감독들을 발 아래에 둔다. 숀 펜이 연출한 영화들을 모두 보지는 않았으므로 전부가 좋다고 할 수는 없고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써스펙트'(2004년 개봉)같은 그의 몇몇 작품들에서는 탁월함이 느껴진다. '써스펙트'는 범죄 스릴러의 장르 속에 집념과 광기 사이를 오가는 형사에 관한 이야기로 풀릴 듯하다가 풀리지 않는 느낌을 남긴다.
미국 네바다주 리노의 형사 제리 블랙(잭 니콜슨)은 곧 정년 퇴직이다. 그에게 깜짝 파티를 열어준 경찰서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 한 여자아이가 살해됐다는 신고가 들어온다. 퇴직 몇 시간을 앞두고 현장에 출동한 제리는 직원들이 죽은 여자아이 지니의 부모에게 소식을 알리는 것을 꺼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나선다. 지니의 부모는 울음을 터뜨리고 제리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본다. 이윽고, 지니의 엄마는 제리에게 범인을 꼭 잡아달라며 영혼을 걸고 맹세해 달라고 한다. 제리는 자신의 영혼을 걸고 범인을 잡겠다고 대답한다.
용의자는 어렵지 않게 체포됐다. 신고한 소년의 증언에 들어맞는 인상 착의의 인디언 사냥꾼 토비 와데나(베네치오 델 토로)는 성범죄 전력이 있고 정신병을 앓기도 했다. 제리의 동료이자 후배 스탠 크로랙(아론 에크하트) 형사는 토비를 상대로 압박과 회유 끝에 그 스스로 범인이라는 자백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토비는 조사실을 나오면서 경찰관에게서 총을 빼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건은 그대로 매듭지어져 버린다. 제리는 토비를 범인으로 남겨놓는 것이 개운치 않다. 스탠 형사가 토비에게 유도 자백을 받아낸 데다 토비가 정신병을 앓은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제리는 퇴직했지만, 그 사건을 계속 파고든다. 살해된 지니가 매주 수요일 들러서 피아노를 배우던 외할머니(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지니의 친구를 찾아가 실마리를 잡는다. 지니가 그린 그림에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차를 탄 거대한 몸집의 남자가 고슴도치를 선물로 준 것으로 표현돼 있었던 것이다. 지니가 그 남자를 '마법사'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제리는 또 인근 다른 지역에서 8년 전에 여자아이 살해 사건이 있었고 3년 전에 여자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제리는 실종된 여자아이의 아버지 짐 올스태드(미키 루크)를 만나고 범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심리 전문의(헬렌 미렌)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 결과 3개의 사건은 삼각형으로 연결되는 지역들에서 일어났으며 8~10세의 금발 여자아이가 피해자이고 살해 당시 빨간 원피스를 입었다는 공통점이 드러난다. 또 3년 전 사건 당시 자살한 용의자 토비가 수감 중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낸다.
제리는 자신이 알아낸 내용들을 갖고 리노 경찰서에 찾아가 범인을 다시 잡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에릭 폴락(샘 쉐퍼드) 서장과 스탠 형사는 제리보고 퇴직했으니 그저 편안하게 지내라고 말한다. 경찰의 재수사 의지가 없음을 확인한 제리는 지도를 보고 차들이 가장 많이 들를만한 주유소와 딸린 주택을 구입한다. 제리는 그 곳에서 지내면서 주유소에 들르는 차들 중 검은 색 웨건을 유심히 살핀다. 검은 색 차 주인 중에는 마을의 목사 게리 잭슨(톰 누난)도 있다. 제리는 마을 벼룩 시장에서 고슴도치 인형을 발견하고 그 인형을 판매하는 가게가 게리 잭슨의 어머니 가게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한편, 제리는 마을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로리(로빈 라이트)와 어린 딸 크리시와 친하게 지내게 된다. 얼마 후, 로리는 전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자 제리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고 제리는 자신의 집에서 편히 지내라고 말한다. 제리는 로리와 연인 관계가 되고 크리시를 친딸처럼 돌봐준다. 가게 앞에서 게리 잭슨이 크리시에게 다가와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건네는 것을 보고 미심쩍어하기도 한다. 어느 날, 크리시는 제리에게 내일 피크닉 공원에서 '마법사'와 만나기로 했다고 이야기한다. 제리는 깜짝 놀랐지만, 크리시에게 티를 내지 않은 채 알았다고 말하고 다음 날 크리시가 찾아간 피크닉 장소에 몰래 잠입한다. 제리의 요청으로 스탠 형사와 경찰 특공대원들도 같이 매복한 채 크리시를 찾아올 '마법사'를 기다린다.
이 영화는 범인을 잡는 과정과 함께 범인을 잡으려는 제리 블랙이라는 인물에 관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 '써스펙트'(용의자)는 원제인 'The Pledge'(맹세)보다 못하다. 이 영화는 여아 살해범을 반드시 잡겠다는 제리 블랙의 맹세를 다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제리 블랙의 범인을 향한 판단과 집념은 틀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후배 스탠은 다른 동료들에게 제리가 젊은 시절 뛰어난 형사였지만, 나이 든 지금은 살짝 맛이 갔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제리 블랙은 은퇴했지만, 형사로서 빼어난 감각은 살아있으며 그것이 지나쳐 광기를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제리 블랙은 은퇴를 했더라도 마지막에 접한 자신의 사건을 마무리해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살해된 지니의 아이의 엄마에게 하는 맹세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그는 선을 넘어버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크리시를 범인을 잡기 위한 함정으로 이용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뒤늦게 황혹녁에 사랑하게 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된다. 그래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범인을 잡아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했으니까. 남들이 아니라고 하는 일을 제대로 해냄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써스펙트'는 바로 그런 사람, 제리 블랙을 뛰어나고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강한 여운을 던지는, 뛰어난 작품이다.
숀 펜이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친밀한 잭 니콜슨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이 위대한 배우는 기꺼이 어려운 배역인 제리 블랙을 연기하기 위해 험난한 과정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잭 니콜슨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훌륭하게 해내면서 그의 걸작 리스트에 이 작품을 더 얹었다. 잭 니콜슨은 이 영화 이후에 '디파티드'(2006년 개봉),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2008년 개봉), '에브리씽 유브 갓'(2010년) 등의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인 후 은퇴했다. 또 숀 펜과 잭 니콜슨은 이 영화에 단역이지만 그 역에 꼭 들어맞는 대단한 배우들을 대거 끌어들였다. 베네치오 델 토로, 샘 쉐퍼드, 아론 에크하트,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헬렌 미렌, 미키 루크, 해리 딘 스탠튼, 그리고 작품 제작 당시에 숀 펜의 아내였던 로빈 라이트가 그들이다. 그들은 숀 펜과 잭 니콜슨의 영화에 대한 안목을 높게 평가했을 것이고 애정과 우정으로 이 영화에 참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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