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2. 00:00ㆍ영화 파노라마
2018년에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해 N차 관람 열풍이 불었을 때 그 영화를 2번 봤다, 5번 봤다 하며 인증샷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고 굉장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N차 관람을 하는 관객들은 주로 젊은 사람들이었고 열정과 에너지가 가득했기에 특정 영화에 대해 그같은 애정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영화관에서 N차 관람을 거의 하지 않는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먼 세계의 관람 문화였다. 영화 관람료가 싼 것도 아닌데 같은 돈으로 다른 좋은 영화 1편을 더 보는 것이 생산적이라는 생각이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두 번, 세 번씩 봐도 좋고 새로운 영화들도 있다. 영화관에서 두 번 이상씩 보지는 않지만, 예전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을 요즘은 블로그 포스팅을 위해서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에서 재관람하는 경우가 꽤 있다. 10년, 20년 이상된 영화들이나 2~3년 전에 본 영화라도 기억이 흐릿해 다시 보게 되는데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좋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최근에 두 번째 본 영화들 중 좋았던 영화로는 '스포트라이트', '스탠 바이 미', '밀리언 달러 베이비', '뉴스 오브 더 월드' 등이었다. 극장에서 볼 때는 피곤해서 졸리거나 부분적으로 놓친 내용도 있는데 두 번째 보니까 더 잘 이해하면서 영화의 정서도 더 잘 느끼게 된다는 느낌이었다. 아마 이것이 N차 관람의 묘미일 것이다.
좋았던 영화들은 자연히 N차 관람을 하게 된다. 최고로 사랑하는 영화이자 갱스터 장르를 뛰어넘는 클래식 걸작 '대부'시리즈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머니볼' 같은 영화는 너무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보다 보니 몇 번씩 보게 된 작품들이다. 블로그 포스팅을 위해서 두 번째 보게 된 '스포트라이트'는 포스팅 때문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몇 번씩 더 보고 싶은 영화이다. 지금 당장 그런 영화들을 떠올려보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조디악', 베넷 밀러 감독의 '폭스캐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좋은 친구들' 등이다. 안 보았는데도 재미없을 것 같은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이미 본 영화들이지만, 이런 영화들을 다시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본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은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는 영화를 보는 것은 극적 긴장감이 약해지지지만, 풍부한 정서나 훌륭한 느낌을 다시 되새기는 기쁨이 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조디악'은 그의 훌륭한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이다. 범인이 잡히지 않는 연쇄살인의 충격파 속에서 그를 뒤쫓는 사람들의 삶이 황폐해지고 시들어가는 느낌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비슷한 이유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뛰어난 작품이긴 하지만, 그의 다른 작품 '살인의 추억'이 전하는 전율과 허무함은 '기생충'의 정서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폭스캐처'는 부자의 아들로 성장해 대등하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의 광기가 뿜어내는 비극을 소름끼치게 보여주며 '용서받지 못한 자'는 악인의 무자비함을 마지막에 한 번에 터뜨려버리는 강렬함을 잊을 수 없다. '좋은 친구들'은 어둠의 세계 속에서 좋은 인간 관계를 맺으며 행복을 꿈꾸지만, 언제나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하는 삶 속에서 끝내는 구렁텅이에 빠질 수 밖에 없는 파국을 담아낸다. 좋은 영화들은 이처럼 단순히 줄거리를 보는 것 이상의 힘이 있다. 그래서 볼 때마다 새로우면서 또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점을 느끼기도 한다.
최근에 본 유튜브 영상에서 유시민 작가가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19살때 읽었던 '죄와 벌'과 최근에 읽었던 '죄와 벌'이 많이 다르게 와닿았다는 소감을 토로했다. 19살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나이 들어서 읽다보니 보이게 되더라는 것인데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음악도 그러하다. 1988년에 나왔던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은 젊은 시절에 겪은 이별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하지만 좀 더 나이 들어서 들어보면 이제는 추억일 뿐인 옛 사랑을 떠올리거나 지나간 젊음의 한 순간을 그리워하는 그 어떤 상징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이런저런 영화들을 많이 보는 것도 좋지만, 좋았던 작품들을 다시 보는 것도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스토리에 집중했던 영화가 좀 더 지나서 다시 보면 영화 속 인물들에 눈이 가면서 그들이 빚어내는 풍부한 정서들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가 단순히 킬링 타임 이상의 것이라면 좋은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여러 영화를 많이 보는 것 이상으로 정서를 채우고 의식을 일깨운다. 그것은 차를 마시며 자연을 바라보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것 같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