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21. 00:00ㆍ영화 파노라마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2019년 개봉)는 미국 영화의 준단골 소재인 인종 차별과 갈등에 관한 영화로 조금 식상한 면이 있다. 그러나, 훌륭하고 가슴을 울린다. 흑인이 노예이던 시대 배경의 영화나 흑인들의 인권이 개선되는 시기를 그린 영화나 할 것 없이 갈등이 화합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스토리는 어느덧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그럼에도 이러한 스토리가 끊임없이 영화화 되는 것은 극적인 면이 가득하고 과거를 돌아보고 선(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데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감동이 함께 한다.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는 흑인들의 인권이 많이 개선된 197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다. 식당과 화장실, 대중교통을 분리함으로써 흑인들에게 제한이 가해지던 시기는 지나간 때이다. 그러나 흑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했고 흑인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던 시기이다.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는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로 다른 영화들과 비슷하게 전개돼 새로움이란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인간 정신의 놀라운 발현을 표현함으로써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리게 한다.
1971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더럼에는 흑백 갈등이 남아있다. 흑인들의 인권 개선을 담은 정책들이 실현돼 북부에서는 많이 개선됐지만 이 곳은 남부 지역으로 여전히 갈등이 가시지 않았다. 더럼의 한 동네에 사는 클래런스 폴 엘리스(C.P. 엘리스·샘 록웰)는 이 지역 백인우월주의 비밀 결사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KKK)의 리더이다. 그는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흑인들에게는 주유하지 않는 등 적대적이며 매우 솔직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한편으로,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듬직한 가장이자 정신지체 장애인 아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같은 동네에는 흑인 여성 인권활동가인 앤 애트워터(타라지 P. 헨슨)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흑인들의 억울한 처지를 대변하며 백인들과 싸우기를 마다않는 '싸움닭'이다.
당시에 백인과 흑인이 식당이나 공공 장소의 공간을 따로 사용하던 시절은 지나갔지만, 학교만은 분리해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흑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큰 화재가 발생한다. 이로 인해 흑인 아이들이 백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학교 내 인종 통합 문제가 거론되었지만 C.P.와 백인들은 반대하고 나선다. 이에 앤과 흑인들은 이 기회에 학교도 통합되어야 한다며 C.P. 등과 맞선다. 백인들 중에는 흑인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리 트럼블리(존 갤러거 주니어) 같은 이들도 있다. 잡화점 사장인 리는 베트남전에 같이 참전한 옛 흑인 전우를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다.
학교 내 인종 통합 문제가 주요 과제로 부상하자 양 측의 의견들을 듣고 해결 방안을 찾아보는 지역 수뇌 회담이 2주 간 일정으로 열리게 된다. C.P.는 아예 나가지 않으려 하지만 반대 의견을 내지 않는 것 자체가 불리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회담의 공동 의장으로 나서게 되고 앤 역시 온건한 북부 지역 흑인들이 관여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공동 의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결코 화합하지 않을 것 같은 양 측은 처음부터 부딪히고 C.P.와 앤도 날카롭게 충돌한다. 그 와중에 앤이 C.P.의 정신지체자 아들을 챙기는 일이 생기고 C.P.는 자신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며 오히려 화를 낸다. 그러나 C.P.의 아내 메리(앤 헤이시)는 앤을 찾아가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2주 동안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C.P.는 마음이 미묘하게 변화해 내적 갈등을 일으키지만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메리가 앤을 찾아간 모습을 우연히 지켜본 KKK 단원들은 C.P.를 은근히 떠본다. 회담 종료일이 다가오자 KKK 단원들은 반대 입장에 서지 않을 것 않은 백인 여성의 집에 찾아가 반대 투표를 해야 한다며 그녀를 협박한다. 마침내 회담이 끝나고 투표로 학교 내 인종 통합 문제를 결정하는 날이 다가온다. 한 명씩 의견을 이야기하고 C.P.가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 위해 연단에 오른다.
영화 제목이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라는 것을 헤아린다면 이것은 앤의 입장에서 C.P.를 바라보는 이야기이고 C.P.의 변화에 대한 스토리이다. C.P.의 변화는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적게는 지역 사회의 큰 전진, 크게는 국가적 차원의 작은 성과임을 뜻한다. C.P.를 연기한 샘 록웰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가 달라지는 인물을 연기하는 데에 더 나은 인물을 찾기 힘든 배우로 그는 '쓰리 빌보드'에서 비슷한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바 있다. 샘 록웰이 투표장에서 행하는 연설은 마음을 뒤흔드는 명연기이다. 앤 역할을 맡은 타라지 P. 헨슨은 에너지 넘치며 열정적인 연기를 인상적으로 펼쳤다. 그녀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탁월한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
이 영화가 평범한 듯 하면서도 훌륭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이야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화 속 실제 인물들이 당시의 그 사건과 자신의 삶들을 돌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기 전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에서 이미 관객들은 감동에 젖었을 것이고 실제 인물들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그들에게 존경심을 갖게 된다. 영화를 연출한 로빈 비셀 감독은 좀 생소한 인물로 이전에 '씨비스킷'을 기획하거나 '헝거 게임:판엠의 불꽃'의 프로듀서로 일한 경력이 있을 뿐 '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가 첫 연출작이다. 50대 중반의 그는 훌륭한 스토리를 솜씨있게 화면에 담아내 감독으로서 늦었지만,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특기할 것은 이 영화에 C.P.의 아내인 메리 역으로 나오는 앤 헤이시가 지난해 8월 교통사고로 별세했다는 점이다. 앤 헤이시는 이 영화 출연 후 '사라져버린'이라는 스릴러 영화를 마지막으로 53세의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고 장기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증했다. 그녀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8년 개봉), '도니 브래스코'(1998), '식스 데이 세븐 나잇'(1998), 리메이크작 '싸이코'(1999), '존 큐'(2002) 등의 영화에 출연,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