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2. 00:00ㆍ영화 파노라마
한 편의 영화가 관객을 순식간에 휘어잡는 경험은 흔치 않다. 2018년에 개봉한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를 보았을 때 그걸 느꼈다. 최근 수년 사이에는 거의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영화에 대해 비판의 씨름을 하려다가 그냥 무장해제되는 영화를 보았을 때의 느낌은 경이롭고 들뜨게 된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이전에는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찾아보고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지 기대감을 높인다. 그것은 영화를 보며 느낄 삶의 기쁨과 풍요로움의 시간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의미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쓰리 빌보드' 이전에 '킬러들의 도시'(2009년 개봉), '세븐 사이코패스'(2014년)를 연출했다. 나는 '쓰리 빌보드'를 본 지 한참 후인 최근에야 그의 전작들을 알고서 '킬러들의 도시'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3월15일에 그의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가 개봉한다고 하니 기대감이 커진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4월말까지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할 프로젝트를 하나 맡게 되었고 '이니셰린의 밴시'의 개봉관 수와 상영시간대가 적은 상황에서 이 영화를 보기가 여유있지는 않으나 어떻게든 시간을 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쓰리 빌보드'는 딸을 죽인 범인을 잡으려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엄마 밀드레드 헤이스(프란시스 맥도먼드)는 살인범을 검거하지 못하는 경찰을 압박하기 위해 마을 외곽 도로변 세 개의 광고판에 빌 윌로비(우디 해럴슨) 경찰서장을 비난하는 광고를 싣는다. 윌로비 서장은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그는 평판이 좋은 경찰관이다. 게다가 그는 췌장암까지 앓고 있어 여생이 얼마남지 않았다. 마을 여론은 윌로비 서장을 편들며 밀드레드를 욕한다.
그러나 밀드레드는 꿈쩍하지 않는다. 밀드레드는 무표정하고 건조하고 거친 성격의 여인이다. 그는 딸과 자주 다퉜고 관계도 좋지 않았지만, 죽은 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무표정한 얼굴 뒤로 숨기고 있다. 탁월한 배우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밀드레드에 빙의한 것처럼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 밀드레드는 어린 여성과 바람나 이혼한 전 남편과 아들 때문에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러나 험한 세파 속에 닳고닳은 밀드레드는 이골이 난 듯 웬만한 일에는 눈도 깜박하지 않는다. 삶이 자신을 뒤흔들더라도 꺾이지 않고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볼 수 있으며 그녀에게 지금 가장 큰 일은 딸의 살인범을 잡는 일이다.
윌로비 서장의 부하 중에는 제이슨 딕슨(샘 록웰)이 있다. 그는 윌로비 서장을 좋아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술하고 인종차별적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런 제이슨이 윌로비 서장을 몰아세우는 밀드레드를 좋아할 수는 없다. 제이슨은 밀드레드가 일으킨 모종의 사건에 얽히게 되고 밀드레드 곁에는 그녀를 좋아하는 난장이 제임스(피터 딘클리지)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를 돕는다. 제이슨과 밀드레드 등이 얽힌 이야기의 고리는 마을 술집에서 살인범으로 보이는 인물이 내뱉는 말을 제이슨이 엿듣고나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쓰리 빌보드'에서 밀드레드 주위의 비극적 사건들 속에서 적의와 분노, 체념, 동정, 긍정적인 변화 등 여러가지 인간의 다채로운 감정들을 능숙하게 담아낸다. 맥도나 감독이 참여한 각본은 비극에 휩싸인 사람들의 다층적이고 파괴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쏟아내며 변화도 많아 매우 흥미롭다. 이처럼 뛰어난 서사는 영화 보는 재미를 충족시키며 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해 실제 그 이야기를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영화는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프란시스 맥도먼드)과 남우 조연상(샘 록웰)을 받았으며 영국 아카데미에서는 배우들의 수상과 함께 작품상도 받아들었다.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한 번 받기도 힘든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무려 세 차례나 받았다. 이 두드러진 배우는 '쓰리 빌보드'에 이어 2021년 '노매드랜드'로 세 번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집없이 떠돌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노매드랜드'에서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경제적 붕괴로 길 위의 스산한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여성 '펀'역을 실감나게 해낸다. 그녀의 첫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은 그녀의 남편 조엘 코엔과 시동생 에단 코엔 형제가 만든 영화 '파고'(1997)에서 따냈다. '파고'에서 프란시스 맥도먼드는 기괴한 살인극의 범인들을 쫓는 여자 경찰서장 마지 군더슨을 연기한다. 그녀는 '야' '야' 라고 말하는 노스 다코타주의 사투리를 구사해 좀 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뛰어난 머리로 천연덕스럽게 일 잘하는 경찰서장 역할을 뛰어나게 표현한다.
사족-킬링타임용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많지만, 좋은 영화를 원하는 관객들도 적지 않다. 좋은 영화를 보고픈 관객들이라면 '쓰리 빌보드'같은 영화는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삶을 사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진실한 모습, 대개 비극으로 드러나는 삶의 위기와 그 때문에 번지는 파장, 어두움 속에서 빛줄기가 비치는 삶의 경이로움 등이 이 한 편의 영화에 모두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