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3. 00:00ㆍ영화 파노라마
2017년 10월에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문을 폭로한 '미투 운동'은 터질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미투 운동'은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MeToo)를 다는 것으로 대중화되었고 직장 및 사업체 내의 성폭행 및 성희롱을 SNS를 통해 더 널리 확산하며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당시에 소셜 미디어, SNS의 폭발력은 갖춰졌지만, 필요한 것은 피해 여성들이 나서는 일이었다. '미투 운동'의 근원을 다룬 영화 '그녀가 말했다'에는 많은 피해 여성들이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 여성들이 입을 열게 된 데에는 '미투 운동' 1년여 전에 발생한 미국 폭스뉴스 내 성추행 고소 사건의 영향력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 사건은 폭스뉴스의 앵커였던 그레천 칼슨이 로저 에일스 폭스뉴스 회장을 성희롱으로 고소한 사건으로 미국 전역을 들끓게 했다. 로저 에일스 회장은 폭스뉴스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인물로 그를 상대로 고소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레천 칼슨이 거대한 권력을 향해 고소의 화살을 쏘아올린 것은 비슷한 상처로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
'밤쉘:세상을 바꾼 폭탄선언'(감독 제이 로치)-'밤쉘'은 '폭탄 껍데기'란 뜻이지만 보통 충격적이거나 놀라운 일을 지칭한다-은 2016년에 일어난 로저 에일스 회장 고소 사건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이 실화 소재의 영화에는 세 명의 여성이 주요 인물로 나온다. 당시 폭스뉴스의 대표적인 여성 앵커였던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 또 다른 여성 앵커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 폭스뉴스의 야심만만한 젊은 여성 직원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이다. 메긴 켈리와 그레천 칼슨은 실존 인물이고 케일라 포스피실은 가공의 인물이다. 이들의 타깃이 된 로저 에일스 회장 역할은 존 리쓰고우가 맡아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
2016년 중반, 보수 성향의 매체 폭스뉴스는 대통령 선거가 한창인 시점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을 보도하느라 분주하다. 폭스뉴스의 대표적인 앵커 메긴 켈리는 관심이 쏠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왜곡된 여성관을 문제 삼는다. 이때문에 켈리가 오히려 뉴스의 초점이 되면서 트럼프 지지자들의 거친 비난에 시달린다. 트럼프 후보와 친분이 있는 폭스 뉴스의 로저 에일스 회장은 곤란한 표정으로 켈리에게 웬만큼 했으니 적당한 선에서 끝내자고 달랜다. 폭스 뉴스의 또다른 앵커 그레천 칼슨은 하락세가 뚜렷하다. 그는 TV 시청률이 떨어지는 오후 시간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칼슨은 자신의 변호사들에게 과거 자신에게 성추행을 일삼았던 에일스 회장 고소건을 물어본다. 변호사들은 같이 나설 여성 피해자가 없으면 승산이 높지 않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 말한다. 칼슨의 팀에서 일하는 케일라는 승진 기회가 생기자 다른 팀으로 옮겨간다. 폭스뉴스에서 성공에 목매달고 있는 케일라는 회장 비서에게 호감을 얻어 에일스 회장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회장실에 들어간 케일라는 몸매를 살피기 위해 한바퀴 돌아보라고 하고 짧은 치마를 팬티가 보이도록 걷어올리라는 에일스 회장의 요구에 큰 모욕감을 느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슨이 해고를 통보받자 그녀는 에일스 회장을 성희롱으로 고소한다. 에일스 회장 고소건은 대통령 선거 뉴스를 지워버릴 정도로 큰 화제가 되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에일스 회장과 측근들은 사내 단속에 나서고 칼슨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도 성희롱 고소 대열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러나 메긴은 별 입장을 나타내지 않은 채 사태를 지켜본다. 성희롱 고소와 관련된 외부 조사팀의 조사가 시작되고 폭스뉴스 직원들은 입을 다물지만, 과거에 칼슨처럼 에일스 회장에게 성희롱 피해를 당한 경험이 있는 메긴은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 회장실에서 모욕적인 성희롱 피해를 당했던 케일라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영화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일어난 여성들의 용기를 그렸다. 영화 속 세 명의 여성은 폭스뉴스의 가치관에 충실한 보수적인 인물들이다. 메긴 켈리는 백인 산타클로스를 흑인으로도 표현해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하지 않고 그레천 칼슨은 총기 소지 지지자이다. 케일라 포스피실은 가족 전체가 폭스뉴스의 애청자인 집안 출신이다. 세 명의 주인공은 사내에서 친분이 있지는 않지만, 여성의 성적 피해에 반대하는 입장에 같이 선다. 여성들이 용기를 내고 힘을 합치자 굳건해 보이던 절대 권력은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상대가 무섭더라도 협력하고 용기를 내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폭스뉴스에서 일어난 일은 세상을 바꾸는 촉매제로 작용한다.폭스뉴스 사건 이전에도 미국의 기업이나 기관 등에서 단편전인 성희롱 소송이 벌어져 가해자인 고위 간부가 물러나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해주는 일이 이따금 있었다. 그러나 폭스뉴스 사건은 인화력이 큰 뉴스가 되면서 남성 위주의 조직 문화 속에서 흔하게 일어나던 성희롱 문화에 일대 경종을 울리게 된다. 기업이나 기관 내 남성 권력자들의 성희롱이 어느 정도 용인되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던 여성들이 더는 참지 않음으로써 나쁜 관행을 척결하는 계기가 된다. 성추행의 일탈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할리우드의 거물 하비 와인스틴도 이 물결에 휩쓸려 기나긴 감옥 생활을 이어나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 영화는 흥미진진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를 동시에 이뤘다. 평론가들은 대체로 별 5개 만점에 3~3.5개의 별점을 부여했다. 영화의 주역들인 샤를리즈 테론과 니콜 키드먼, 마고 로비, 그리고 존 리쓰고우의 연기는 탁월하며 케일러의 친구 제스 칼 역할을 맡은 케이트 맥키넌의 연기도 눈길을 끌 만하다. 영화 후반부에는 노배우 말콤 맥도웰이 폭스뉴스의 소유주인 루퍼트 머독 회장 역할로 나와 반가웠는데 퇴폐적인 로마 시대를 그린 '칼리귤라'(1991년 개봉·틴토 부라스 등 감독)에서 칼리귤라 황제 역할을 맡았을 때가 떠올랐다.
이 영화를 만든 제이 로치 감독은 연출 역량이 만만치 않으며 제작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그는 1990년대의 '오스틴 파워'시리즈와 이후의 '미트 페어런츠' 시리즈 등 코미디 영화를 주로 만들다가 최근에는 세상에 영향을 준 실화 사건과 인물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에 '매카시 광풍'이 몰아치던 시대에 블랙 리스트에 올라 가명으로 시나리오를 쓰다 '로마의 휴일'을 쓴 천재적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의 삶을 다룬 '트럼보'(2016년 개봉)도 그가 만들었다. '트럼보'는 로치 감독의 최고 작품으로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