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6. 00:00ㆍ영화 파노라마
넷플릭스의 '떠오르는 콘텐츠'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1993년 개봉)는 영화의 풍부한 요소들을 다양하게 갖고 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과 경험, 괴팍한 중년 남자와 순수한 소년의 교감, 그로 인해 의식이 자라나는 소년, 아름다운 여인과의 순수한 만남, 그리고 잊지 못할 음악이 있다. 스크린에서 흔하게 만나는 액션과 전쟁은 이 영화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평범한 일상은 액션과 전쟁이 없는 삶이며 어떠한 큰 자극이 없어도 이따금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성장할 수 있음을 이 영화는 알려주고 있다.
고등학생 찰리 심스(크리스 오도넬)는 크리스마스에 고향에 가기 위해 일찌감치 부활절 연휴 동안 아르바이트에 나서야 한다. 찰리는 교내 아르바이트 게시판을 보고 찾아간 집에서 퇴역 장교 프랭크 슬레이드(알 파치노 분) 중령을 만나게 된다. 찰리는 사고로 시력을 잃은 슬레이드의 괴팍하고 충동적인 성격에 놀라지만, 주말 동안 가족이 떠난 슬레이드 중령을 돌보기로 한다. 하지만 슬레이드 중령은 오랫동안 몰래 준비해왔던 뉴욕 여행을 감행한다. 조용한 주말 아르바이트를 기대했던 찰리는 얼떨결에 슬레이드 중령을 따라 나선다.
슬레이드는 최고급 호텔과 식당을 드나들고 리무진을 타고 다니며 어린 찰리에게 새롭고 특별한 인생 경험을 시켜준다. 특히 향기로 여자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던 슬레이드 중령은 식당에서 처음 만난 도나(가브리엘 앤워)에게 다가가 함께 탱고를 추자고 말을 건넨다. 슬레이드는 앞이 안 보이지만 탱고 음악에 맞춰 도나를 노련하게 리드하고 도나는 그와 함께 멋진 조화를 이룬다. 이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슬레이드는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고 찰리는 당황해 그를 말린다.
'여인의 향기'는 1963년의 이탈리아 영화가 원전으로 설정만 같고 내용은 달리 한 리메이크 작품이다. 원작에서는 동행하는 소년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미국 버전에서는 찰리 역의 크리스 오도넬이 중량감 있게 다뤄진다. 찰리는 단순히 슬레이드 중령을 불쌍하게 느끼고 돌본다고만 생각했다가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교감을 나누게 된다. 슬레이드 중령도 찰리와의 만남을 계기로 인생을 뒤돌아보고 찰리도 낯선 뉴욕 나들이를 통해 자신이 성장했음을 알게 된다. 둘 다 훌륭한 작품으로 두 번째 영화가 낫다는 평들이 많지만, 일부는 이탈리아 작품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여인의 향기'는 1993년 골든글러브 작품상을 받았고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며 알 파치노가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거머쥐도록 했다.
알 파치노는 뜨거운 배우이다. 알 파치노가 차갑게 연기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알 파치노는 뜨거운 연기 만으로도 모든 것을 뒤덮어버리며 연기의 정복왕 같은 이미지를 지닌다. '여인의 향기'에서도 그는 슬레이드 중령의 괴팍함과 강렬함을 다른 배우가 범접할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다른 어떤 배우도 알 파치노만큼 슬레이드 중령 역에 어울릴 것 같지 않다. 크리스 오도넬과 가브리엘 앤워가 지닌 순수함은 알 파치노의 괴팍함과 뚜렷이 구분된다. 그것은 어울릴 수 없고 어우러질 수도 없을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멋진 화학 작용처럼 화합한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충돌하는 세상에서 그것은 한줄기 빛과도 같은 메시지이다.
'여인의 향기'를 연출한 마틴 브레스트 감독은 탁월한 연출자이다. 그는 에디 머피 주연의 유명한 코미디 '비벌리힐스 캅'(1985년 개봉)을 내놓았고 로버트 드니로가 나오는 익살맞은 영화 '미드나이트 런'(1990년 개봉)도 만들었다. '여인의 향기'에 이어 브래드 피트와 안소니 홉킨스가 나오는 '조 블랙의 사랑'(1998년 개봉)도 그의 작품이지만 2003년에 개봉한 '갱스터 러버'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아쉽게도 20년째 영화 연출을 하지 않고 있다.
'여인의 향기'가 나온 지 30년이 지나면서 이 영화는 추억도 되살린다. 알 파치노의 중년 시절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풋풋한 크리스 오도넬과 가브리엘 앤워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크리스 오도넬은 오똑한 콧날과 선량한 눈망울로 여성 팬들의 인기를 얻었지만, 배우로서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크리스 오도넬의 학교 친구로 단역으로 나오는 필립 시모어 호프만(1967~2014)의 데뷔 시절 모습과 그가 나중에 대배우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비교된다. 영국 출신의 가브리엘 앤워도 아쉬움을 남기는 배우이지만 꾸준히 연기 활동을 이어왔다. 그러나 상관없다. 오래 전 영화라도 여전히 울림을 주고 새로움을 주고 그 속에서 배우들의 온기를 느낄수만 있다면 그것은 영화 팬들의 큰 특권이자 기쁨이다.
그리고 이 음악, 포르 우나 카베자(Por Una Cabeza)를 빼놓을 수 없다. 알 파치노와 가브리엘 앤워가 레스토랑에서 춤출 때 연주되는 탱고 음악이다. 알 파치노는 '여인의 향기' 20년 전의 '대부'에서 아폴로니아 비텔리 역의 시모네타 스테파넬리와 결혼식 피로연 장면에서 춤추기도 했다. '대부'에서 추는 알 파치노의 춤은 청년 시절의 사랑의 기쁨이었고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의 춤은 젊은 여성을 순수한 즐거움으로 안내한다. '포르 우나 카베자'는 탱고를 대표하는 불멸의 음악인데 '여인의 향기'에서 그 선율을 들려줌으로써 더 많은 대중이 이 음악을 즐기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