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개척하는 한국인 이민자 가정의 애환이 남기는 여운, '미나리'(넷플릭스, ft.윤여정, 스티븐 연, 한예리, 정이삭 감독)

2023. 2. 16. 00:00영화 파노라마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미국 아칸소에서 새 삶을 일구려 한다.

오랫만에 바깥 나들이하러 대구 외곽의 팔공산쪽으로 차를 몰았다. 옆 좌석의 아내도 들뜬 표정이다. 요즘 제철인 미나리와 삼겹살이 일품인 'ㅇㅇㅇ 참숯 가든'이라는 식당에 갔다. 팔공산 파계삼거리에서 칠곡 방면으로 10여 분쯤 가면 나오는 식당인데 미나리는 진한 향과 부드러운 식감을 가지고 있고 두툼한 삼겹살은 육즙이 풍부하며 밑반찬도 하나같이 맛있는 곳이다. 미나리는 대구 인근의 청도 한재 미나리가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팔공산 미나리도 그에 버금간다.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오늘 블로그 포스팅 주제가 무엇일 것 같냐고 퀴즈를 냈더니 아내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미나리!"라고 대답했다. 너무 쉽게 맞춰 김이 빠졌지만, 정답이다.

 

정이삭 감독의 2021년 개봉작 '미나리'는 질기지만, 향긋한 미나리 같은 영화이다. 미나리는 양념을 하는 다른 음식들과 달리 깻잎, 풋고추처럼 주로 재료 자체의 맛으로 먹는다. 영화 '미나리'도 양념을 하지 않고 먹는 미나리처럼 담백하고 깔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영화가 끝난 후 미나리의 향과 같은 여운이 떠나지 않는다. '미나리'는 또 낯선 미국의 시골에서 정착하려 애쓰는 한국인 이민 가정의 강한 생명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순자(윤여정)가 한국에서 가져와 미국 아칸소에 이식한 미나리는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식물'로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제이콥과 모니카의 아이들인 외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온 순자(윤여정)는 자기 중심적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은 이에 불만을 가진다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부부는 미국 아칸소의 시골에서 새 삶을 개척하려 한다. 이 부부의 부탁으로 어린 남매 앤(노엘 케이트 조)과 데이비드(앨런 킴)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외할머니 순자가 도착한다. 제이콥은 새 정착지에서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성취를 보여주기 위해 농장 개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사로 일한다. 어린 남매들은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손주들을 돌보기보다 자기 관심사에 열중하는 외할머니에 불만을 가진다. 순자는 집 주변의 개울에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며 미나리를 심는다.

제이콥의 농장 개간 사업은 위기에 처한다. 척박한 땅에 가뭄까지 들자 물을 끌어와야 하는 등 어려움이 하나둘이 아니다. 부부 간에 불화도 싹튼다. 농장을 성공시키는 데에 몰입하는 제이콥에게 모니카는 차라리 캘리포니아로 가서 다른 삶을 살자고 말하지만 제이콥은 자신은 남아 농장을 성공시키겠다고 응수한다. 이에 모니카는 가족이 함께 하는게 중요한 것 아니냐며 제이콥에게 서운함을 드러낸다. 이 무렵 순자와 손주들은 점차 친밀해지고 아이들은 교회에서 미국인 아이들과 사귀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순자의 실수로 창고와 농장이 불타고 이 가족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

순자는 집 주변의 개울가에 적응력이 뛰어난 미나리를 심는다.

'미나리'는 한인 가족이 미국의 시골에서 정착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차분히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충분히 뜨거울만 한데도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에서 한인 가족들을 담담히 관찰하는 데에 그친다. 그래서 화재와 같은 큰 사고가 났음에도 울부짖으며 좌절하는 모습은 내보이지 않고 실의에 잠시 빠졌다가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이삭 감독이 자기 가족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감독이 그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또 정이삭 감독은 알려지기로 지적이면서도 조용한 인물로 영화의 흐름이 감독의 성향을 닮은 듯하다.

이렇듯 '미나리'는 다소 심심한 영화이다. 빠르고 자극적인 영화들을 좋아하는 젊은 관객들은 '미나리'를 잘 보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나리'는 슴슴한 냉면처럼 싱거우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작품이다. '인종 차별' 같은 사회 문제보다는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내일을 기약하려는 한인 가족의 성실하고 치열한 삶과 가족애가 여운을 남긴다. 미국 영화계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이 독립 영화에 주목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서부개척시대 이래 척박한 삶을 개척하고 가족애를 중시한 미국적 가치를 '미나리'가 되살렸다고 느꼈을 것이다.

가장으로서 성취에 집착하는 제이콥과 가족이 함께하는 행복에 의미를 두는 모니카는 의견 충돌을 빚기도 한다.

'미나리'는 또 미국 영화계가 사회적으로 챙겨 볼 소재가 많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민자들의 국가인 미국은 인종 차별과 갈등, 그로 인한 각종 사건사고가 증가하고 있고 최근에는 더 노골화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회 문제들이 영화에서 많이 다루어져 미국 사회를 되돌아보게 했지만, 메이저 영화사와 미국의 주류 영화계는 이를 점차 외면하고 '마블 영화'같은 히트작 만들기에 골몰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민자 사회'의 문제점을 깊이 파고들어 많은 걸작들을 내놓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마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고 꼬집은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할리우드의 한계일수도 있겠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관객들이 현실을 직시하게도 했지만, 그것 보다는 고달픈 현실을 잠시 잊고 영화에서나마 꿈을 꾸거나 환상에 젖도록 이끌어왔다. 영화에는 두 가지 기능 모두 필요하지만, 할리우드는 후자의 기능에 더 치중해왔다. 그래서 할리우드를 일컬어 '꿈의 공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꿈을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칭찬인 동시에 현실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데 대한 비아냥이기도 한 것이다.

 

사족-윤여정 배우가 '미나리'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해 놀라게 했지만, 윤여정과 한예리의 극중 모녀 관계가 그럴듯 하게 표현되지 않은 점은 좀 아쉬운 부분이다. 윤여정의 연기가 더 인상적이었던 배역은 '죽여주는 여자'의 '박카스 할머니' 소영 역을 꼽고 싶다. 윤여정은 이 영화에서 노인들의 매춘 상대로 어렵게 살아가는 여인이지만,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인의 죽여달라는 부탁을 듣고 고민하다 그를 진짜 죽여준다. 윤여정은 이 영화에서 삶에 체념한 듯 달관한 듯 심드렁하게 살면서도 사람에 대한 연민을 지니는 인물 소영을 아주 훌륭하게 연기한다. '죽여주는 여자'가 아카데미상 후보작이었다면 윤여정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