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15주기에 보는 히스 레저 다큐멘터리 영화-불꽃처럼 스러진 짧은 삶, '아이 앰 히스 레저'(넷플릭스)

2023. 1. 17. 00:00영화 파노라마

 

최근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가 50대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지난 해에는 배우 강수연이 역시 50대의 이른 나이로 별세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러던 차에 강수연이 남긴 유작 '정이'가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된다 하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때로 유명 스타들이 일찍 세상을 뜨는데 팬들의 마음은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고보니 독창적이고 걸출한 연기로 촉망받았던 히스 레저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5년이 다 됐다. 2008년 1월22일에 그가 갑작스럽게 숨졌을 때 전 세계 영화팬들이 충격을 받았던 상황이 생각난다. 당시 히스 레저는 배트맨 영화인 '다크 나이트'의 두드러진 조커 연기로 관심이 집중되던 상황이었고 그의 나이 불과 28세밖에 되지 않았으니 너무나 황망했다.

히스 레저의 사망 15주기가 다가오는 시점에 그의 삶과 연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 앰 히스 레저'를 넷플릭스를 통해 보았다. 이 영화는 2017년 10월에 국내 개봉된 작품으로 최근에 넷플릭스에 등록되었다. 히스 레저의 가족과 친구들, 나오미 왓츠와 이 안 감독 등 할리우드 동료 배우와 관계자들이 그의 삶과 연기, 예술을 이야기하고 히스 레저 본인의 생전의 모습과 목소리를 담은 영화이다.

 

히스 레저는 1979년에 호주 서부의 도시 퍼스에서 태어났다. 호주에서도 동부의 시드니나 멜버른이 아니라 퍼스가 고향이니 세상의 외곽 오지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히스 레저는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꾼 에너지 넘치는 소년으로 고교 졸업 후 친구들과 함께 시드니로 여행을 떠났다. 히스 레저는 오디션을 거뜬히 통과해 호주의 TV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고 이후 바로 미국의 LA로 향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의 오디션에서 순조롭게 배역을 따내 좋은 연기로 눈도장을 찍었다. 다른 배우들이 흔히 무명 시절을 겪으며 고생하는 것과 달리 히스 레저는 연기력이 좋아 오디션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됐다.

히스 레저는 이후 하이틴 로맨스 영화 출연 제의를 많이 받았으나 다른 장르로 눈을 돌렸고 2000년 7월에 개봉한 '패트리어트-늪 속의 여우'에 나오게 됐다. 같은 호주 출신의 대선배 멜 깁슨의 아들 역할이었다. 그는 존경하는 대선배와 연기한다는 것에 많이 떨렸으나 따뜻한 멘토로 나선 멜 깁슨의 격려를 받으며 역할을 잘 소화했다. 이어 '기사 윌리엄', '몬스터 볼'에 잇따라 출연했고 이 안 감독은 '몬스터 볼'의 인상적인 연기에 매료돼 히스 레저를 제이크 질렌할과 함께 '브로크백마운틴'의 주연 배우로 점찍었다. '몬스터 볼'에는 빌리 밥 손튼과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게 되는 할리 베리가 출연했지만 이 안 감독은 조연인 히스 레저가 제일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빠르게 성공한 히스 레저는 LA의 자택을 개방해 친구, 영화 관계자들이 언제나 드나들 수 있도록 했으며 그들과 함께 지냈다. 그가 친구들을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자신이 성취한 성공을 친구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의 집은 마치 1970년대 히피들의 공동거주지 같았다. 그가 집에 없을 때에도 그의 집에는 항상 친구들이 와 있었다. 그 중에는 가난한 배우와 예술인들도 적지 않았으며 히스 레저는 그들을 보살폈다. 히스 레저는 매우 활기찬 사람이어서 영화 뿐만 아니라 사진, 음악도 좋아했고 영감이 떠오르면 즉시 실행에 옮기곤 했다. 항상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찍었고 음반도 집에 가득 진열해 놓았다. 나중에 친구들과 함께 인디 레이블 회사를 차려 유망한 무명 가수의 음반을 제작하고 자신이 홍보 영상  감독으로 나서 촬영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히스 레저는 '브로크백마운틴'의 동성애 연기로 또 한번 할리우드를 술렁이게 했다. 게이 카우보이로서 제이크 질렌할을 사랑하는 애틋한 마음을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여성 팬들을 의식해야 하는 남성미 넘치는 배우였지만, 언제나 새로운 역할에 목말라 했기에 동성애자 역할을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였지만, 촬영을 앞두고 항상 불안해하기도 했다. 연기력은 자신 있었지만,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한 부담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아내로 나온 미셸 윌리엄스와 인연을 맺어 동거-3년 뒤인 2007년에 헤어진다-하게 되고 딸 마틸타의 아빠가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의 연기에 대한 집념은 '다크 나이트'의 '조커'로 절정의 빛을 발했다. 그는 이 역할을 맡게 되자 수 주 동안 방에 칩거하며 조커의 걸음걸이와 말투, 몸짓 등을 연구했고 전에 볼 수 없었던 악당으로 탈바꿈하게 된다.공포에 질린 상대를 향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왜 이리 심각해?"라고 말하거나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즐거운 표정으로 혀로 입술을 핥는 장면은 히스 레저의 창의적 연기가 빚어낸 새로운 악당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히스 레저는 성공적인 '다크 나이트' 촬영을 마치고 테리 길리엄 감독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 극장'에 출연해 촬영하던 중 뉴욕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너무나 갑작스런 이별이어서 그의 친구들과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한동안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지내야 했다. 히스 레저는 사후에 조커 연기로 아카데미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당시를 회고하는 히스 레저의 친구들에 따르면 히스 레저는 원래 에너지가 넘쳐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어서 잠 자는 시간도 아까워했고 그 무렵에는 심한 불면증 때문에 힘들어 했다. 특히 평소에 자신은 요절한 커트 코베인처럼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며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므로 되도록 많은 것을 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히스 레저의 사인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나 의사의 잘못된 처방에 따른 약물 오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내용이었다. 히스 레저의 친구들은 그가 에너지 넘치고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절대 잘못된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히스 레저 같은 유명한 스타의 삶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다큐멘터리 영화로나마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보는 것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에 비친 그의 짧은 삶 속에서 히스 레저는 남다른 끼를 지닌 배우들 중에서도 더 유별난 개성을 지닌 존재로 보인다. 창의적인 예술혼이 그의 뇌를 극도로 자극시켜 편안한 휴식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생전 그의 모습은 아주 장난기 넘치고 때로 진지하고 삶의 매 순간 마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충실하다. 그래서 그의 육체가 없어진지 오래지만, 지금 돌아보는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더욱 슬프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사족-히스 레저의 이름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히스클리프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멋지지만 복잡하고 거친 인물인데 그의 이름을 따지 말고 차라리 다른 이름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히스 레저가 다른 이름으로 살았더라면 삶이 좀 더 다르게 펼쳐지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