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3. 08:00ㆍ영화 파노라마
이 블로그 '불타는 스포츠' 카테고리에 카타르 월드컵에 관한 글을 쓰면서 '혁신가' 요한 크루이프를 다루다보니 영화에서도 '혁신가'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빌리 빈 단장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머니볼'입니다. '머니볼'은 만듦새가 매우 탁월한 작품으로 베넷 밀러가 감독했습니다. 베넷 밀러는 도자기를 아름답게 빚듯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으로 그의 다른 작품 '폭스캐처'와 '카포티'도 추천하고 싶습니다.
2011년에 제작된 '머니볼'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경이로운 2002년 시즌을 이야기합니다. 어슬레틱스는 돈을 많이 쓰지 못하는 작은 구단인데 2002시즌을 앞두고 제이슨 지암비, 자니 데이먼, 제이슨 이스링하우젠 등 핵심 선수들이 대거 다른 팀으로 옮겨갑니다. 자금 부족으로 전력 보강을 하지 못한 채 시즌에 나선 어슬레틱스는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이에 빌리 빈 단장은 전력 강화를 위해 당시로서는 생소한 야구 이론에 기반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선수들을 영입합니다.
빌리 빈은 세이브매트릭스 이론에 근거해 출루율이 높은 선수들을 영입하지만 보수적인 감독과 스태프의 반발에 부딪힙니다. 아트 하우 감독과 경험이 풍부한 스카우터들은 타율과 방어율 등 우선적인 기록보다 볼넷 식별 능력 등을 더 중시하는 빈 단장을 이해하지 못해 그와 충돌합니다. 선수를 보는 눈과 경험이 풍부한 자신들을 무시하고 선수단 개편에 나서는 빈 단장을 받아들이지 못해 일부는 팀을 떠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 시즌은 이어지고 어슬레틱스는 계속 고전하지만 차츰 달라진 모습을 보이다 마침내 대반전을 만들어냅니다.
베넷 밀러 감독은 영화를 군더더기 없이 매우 매끄럽게 만듭니다. 또 영화 속 인물들과 거리를 두고 그들의 삶을 관찰하듯 영화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정성을 들여 도자기를 훌륭하게 빚어내는 장인처럼 느껴집니다. '머니볼'은 밀러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좋은 연기로 잊혀지지 않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스포츠 소재 영화이지만 스포츠 보다는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에 반대하는 사람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짚어냅니다. 실화와 실존 인물에 바탕을 뒀지만 부분적으로 각색이 됐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슬레틱스의 2002년 시즌 자체는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인 사실로 가득차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브래드 피트가 빌리 빈 단장 역할을 매우 인상적으로 해냈습니다. 빌리 빈 단장은 잘 생긴 프로야구 유망주였으나 활약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쓸쓸히 은퇴한 뒤 야구단 단장과 경영자로 성공한 인물로 브래드 피트가 영화에서 제대로 살려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보수적인 아트 하우 감독 역할을 맡았고 빌리 빈 단장의 보좌관 역할을 맡은 조나 힐의 연기도 좋습니다. 크리스 프랫은 신인 시절에 이 영화에서 어슬레틱스의 1루수 스캇 해티버그 역을 맡아 주목을 끌었습니다. 영화 말미에 빌리 빈 단장의 딸이 아빠 앞에서 렌카의 '더 쇼'(The show)를 부를 때에는 조용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베넷 밀러 감독의 '폭스캐처'도 아주 훌륭한 작품입니다. '폭스캐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레슬링 선수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가 유명한 부호 존 듀폰(스티브 카렐)의 후원을 받으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습니다. 마크는 서울 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따려는 의지가 강하지만 자신보다 훨씬 유명한 형 데이브(마크 러팔로)의 그늘에 가려 있습니다. 듀폰은 통제욕이 강한 기이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마크를 물심양면으로 돕다가 마크의 형 데이브까지 합류시킵니다. 이들로 구성된 '폭스캐처'팀은 열심히 훈련을 이어가지만, 예기치 못한 비극에 휩싸이게 됩니다.
'카포티'는 작가 트루먼 카포티(필립 세이무어 호프만)가 1959년 캔사스주 농장 일가족 살인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쓰는 과정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카포티는 살인죄로 복역하며 사형을 기다리는 두 명의 범인 중 페리 스미스(클리프톤 콜린스 주니어)에 집중해 그에게서 범행 당시의 상황을 캐냅니다. 그러나 페리 스미스는 가장 중요한 핵심 부분을 감추고 있었고 카포티에 기대어 사형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카포티는 그의 속셈을 알면서도 그에게서 마지막 핵심을 끄집어내는 데에 주력합니다.
'폭스캐처'는 본 영화이고 '카포티'는 관람 시기를 놓쳐서 보지 못했습니다. '폭스캐처'는 좋았던 인간관계가 뒤틀린 성격의 인물로 인해 균열이 생기면서 벌어지는 비극을 다룬 걸작입니다. 비극적 사건을 담으면서도 카메라의 시선은 차분하고 냉정하게 느껴져 영화가 주는 울림은 오히려 더 커집니다. '카포티'는 사건의 가해자로 고난에 빠진 인물과 그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욕심을 추구하는 인물을 그려내 커다란 사건 뒤에서 포착되는 인간의 다층적 면모를 잘 담아냈습니다.
베넷 밀러는 영화를 자주 만들지 않는 감독입니다. 2006년에 '카포티'를 만들었고 5년 뒤인 2011년에 '머니볼'을, 4년 뒤인 2015년에 '폭스캐처'를 발표했습니다. 실화에 바탕한 작품들을 다루는데 4~5년마다 한 편 정도 만들다보니 세공 작품을 정성들여 조각하는 것 같습니다. 내놓는 작품마다 훌륭하니 관객 입장에서는 애타게 기다리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폭스캐처'를 만든지 7년이 지났으니 그의 작품이 나올 때가 됐네요. 별다른 소식이 없지만, 그가 하루빨리 새 작품을 들고 나오길 기대합니다.
사족-'머니볼'과 '폭스캐처'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폭스캐처' 실화를 다룬 다큐멘터리 '팀 폭스캐처'도 있으니 이 작품을 함께 보면 실제 사건의 비극적 요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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