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의 재치와 케이트 블란쳇의 빛나는 연기, '블루 재스민'-허영과 위선의 막다른 길(넷플릭스, ft.알렉 볼드윈,샐리 호킨스 등)
3명의 케이트 중에 윈슬렛이 떠올랐다가 요즘에는 블란쳇이 더 잘 나가는 것 같다. 물론 윈슬렛은 활동이 좀 뜸할뿐 여전히 정상에 있다. 베킨세일은 필모그래피가 좋지 않아 정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모스 가문의 또다른 케이트는 언급할 대상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지만, 그 곳은 영화계가 아니라 모델계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여러 명의 케이트들 중 가장 언니로 올해 54세이다. 하지만, 그녀는 감독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배우들 중 하나로 최근 들어 더욱 바쁘게 연기 활동을 하는 것 같다.
호주 출신인 케이트 블란쳇은 일찍부터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로 소문났고 1994년에 데뷔한 이래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무려 47편의 영화에 주, 조연으로 나왔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입꼬리에서 약간의 교활함도 내비치는 그녀는 두 번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연기를 비롯해 사랑스러운 애인, 신데렐라의 못된 계모 등 아주 다양한 역할을 연기했다. 2월22일 개봉되는 '타르'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수석 지휘자 리디아 타르를 맡았다. 케이트 블란쳇은 이 쉽지 않은 역할을 탁월하게 소화해냄으로써 베니스국제영화제와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이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3월에 예정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타르'를 여우주연상을 포함해 작품상, 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려 놓았다.
케이트 블란쳇은 9년 전에 벌써 정상에 도달했다. 그녀는 2013년에 개봉한 '블루 재스민'의 훌륭한 연기로 다음해 열린 미국 아카데미, 영국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크리스틱 초이스, 런던비평가협회, 미국배우조합상의 여우주연상을 모조리 손에 거머쥐었다. '블루 재스민'은 우디 앨런 감독의 재기 넘치는 코미디드라마로 뉴욕 상류층으로 사치스런 삶을 살던 재스민이 한순간에 몰락해 샌프란시스코의 가난한 여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는데 이 영화는 반대로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적인 재스민의 삶을 들여다본다. 케이트 블란쳇은 우디 앨런 감독의 훌륭한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뛰어난 연기로 작품을 빛나게 한다.
영화는 재닛 '재스민' 프란시스(케이트 블란쳇)가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난 옆자리의 승객에게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장면으로 막을 올린다. 재스민은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치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인다. 그녀는 뉴욕 상류층의 삶을 살다 남편 할(알렉 볼드윈)이 바람 피운 것을 알게 돼 헤어지고 그가 사기죄로 수감되는 바람에 모든 재산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할 수 없이 평소에는 찾지도 않던 여동생 진저(샐리 호킨스)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있는 집에 의탁하기 위해 그 곳으로 가던 길이다.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옆자리 승객에게 자신의 삶을 아무렇지 않은 듯 들려주지만, 그녀는 가라앉은 자신의 현실을 잘 알고 있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정반대의 상황에 떨어져버린 재스민은 가끔씩 자신의 화려했던 뉴욕 시절을 돌이켜보며 혼자말을 한다. 진저는 언니를 따뜻하게 배려하지만, 이같은 모습을 보고 언니가 신경쇠약증에 걸렸다고 여긴다. 영화는 재스민의 딱한 현실과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오가며 전개되는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재스민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또 진저의 남자 친구 칠리(바비 카나베일)는 별 생각없이 재스민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질문을 퍼붓는데 이 상황이 묘하게 웃기다. 재스민은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줄 남자를 찾는데 드디어 자기가 바라던 이상적인 조건의 외교관 드와이트(피터 사스가드)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디 앨런이 얼마나 재기 넘치는 감독인지를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우디 앨런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의 영화를 압도적인 대사의 힘으로 물들이기 이전에 영화에서 대사의 힘을 보여줬던 감독이다. 우디 앨런의 대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스릴 넘치는 대사와 다르게 재기발랄하며 상황 속에서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가령, 칠리가 재스민에게 무심코 "그래서 무슨 공부를 하고 싶어요?"라고 거듭 물을때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재스민의 표정은 웃지 않을 수 없다. 재스민을 고용한 치과의사 플릭커(마이클 스털버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재스민에게 눈치없이 들이댈 때, 그리고 재스민의 비밀을 알게 된 드와이트가 점잖던 평소 모습과 달리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며 재스민에게 화를 내는 모습도 웃기긴 마찬가지다.
영화 속 인물들이 저마다 진지한데 그것을 웃기게 느끼도록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디 앨런은 그런 면에서 아주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는 감독이다. 우디 앨런 감독은 그 자신을 모델로 한 신경질적인 뉴요커를 자주 영화에 등장시키며 직접 그 역할을 함으로써 묘한 페이소스를 자아냈다. 또 그가 신경질적인 뉴요커를 영화 속에서 내세우기 전에 어수룩한 인물로 출연한 초기작 '돈을 갖고 튀어라'(1969년 개봉)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폭소를 터뜨리게 하며 그가 얼마나 탁월한 코미디언인지를 알려준다.
우디 앨런은 작품 세계를 점차 넓혀가면서 '블루 재스민'같은 작품들을 만들었으며 다양해지는 작품들 속에서도 재기는 여전히 번뜩인다. 다만,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다르게 작품들의 편차가 생겨나기는 한다. 이 작품 '블루 재스민'은 그렇지 않으며 전성기 때 작품처럼 재치가 넘치고 할의 예측하기 어려운 운명이 갑자기 긴장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아들 대니(알든 에런리히)는 이 영화에서 불행한 성장과정을 겪어 유일하게 무겁고 진지한 인물이다. 대니는 자신을 찾아온 재스민에게 차가운 말을 쏟아내는데 대니의 모질고 매정한 말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영만 쫓던 재스민이 잔인한 운명의 덫에 걸려들었음을 깨닫게 한다. 우디 앨런 감독이 코미디로 끝날 듯한 드라마에 경종을 울리며 정신을 차리게 하는 뛰어난 연출이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우디 앨런 감독이 수년 사이에 과거에 아동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논란에 휘말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블루 재스민'은 유명한 작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7년 개봉)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하며 케이트 블란쳇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어울리는 눈부신 연기를 펼친다. '블루 재스민'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재해석했다면 케이트 블란쳇은 '블랜치 드부아'-비비안 리가 연기했다-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 '선셋대로'(1950년 개봉)의 '노마 데스몬드'일 수도 있다. 글로리아 스완슨이 연기한 노마 데스몬드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로 과거에 사로잡혀 광기를 비치는 인물이다. 케이트 블란쳇은 광기까지 부리지는 않지만,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에 사로잡혀 혼잣말을 하는, 약간의 망상적 연기를 훌륭하게 펼침으로써 비비안 리나 글로리아 스완슨을 무덤에서 불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