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노라마

<문화 잠망경>브루스 윌리스의 슬픈 시간(넷플릭스, ft.'레드', '펄프 픽션', '데드 위시' 등)

노우빅 2023. 2. 19. 00:00

 

1990년 개봉작 '다이 하드 2'에서 연기하는 브루스 윌리스

할리우드 스타 브루스 윌리스가 최근에 치매를 앓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브루스 윌리스는 지난해 3월 실어증에 걸려 영화계에서 물러난 후 최근에 전측두엽성 치매(FTD)라는 병명을 진단받았다. 전측두엽성 치매는 일반적인 치매와 달리 비교적 이른 나이에 발병하며 증상이 나타난 후 평균 수명이 7~13년이라고 한다. 브루스 윌리스가 앓고 있다는 '실어증'도 전측두엽성 치매의 한 증상이라고 한다. 올해 68세인 브루스 윌리스가 영화배우로서는 이른 나이에 연기를 접은 것도 모자라 치매 환자가 됐다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브루스 윌리스의 대표작은 1988년에 개봉된 '다이 하드'를 꼽을 수 있다. 존 맥티어넌 감독이 만든 이 작품에서 브루스 윌리스는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 스타로 팬들에게 알려졌고 이후에 이어지는 시리즈 작품들에서 변함없는 연기로 인기를 끌었다. '다이 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는 초인적인 능력을 과시하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과는 달리 좀 더 평범하고 인간적인 존 맥클레인 형사를 연기했다. 다치고 얻어맞고 불안해 보이지만, 결코 굴하지 않으며 끝내 적들을 물리치고 위기를 헤쳐나가는 인물이다.

1998년에 개봉한 영화 '아마겟돈'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벤 애플렉과 공연하고 있다.

존 맥클레인 형사의 특징은 말발이 세다는 점이다. 그는 힘든 상황에서 불평을 터뜨리며 적들과 맞섰을 때는 겁먹기도 하면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그러한 상황 속의 행동과 말로, 또는 간간이 던지는 유머로 웃음짓게 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람보'시리즈의 실베스터 스탤론이 과묵한 것에 비하면 브루스 윌리스는 말많고 불평과 유머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한다. 하기야 슈왈츠제네거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로봇이고 스탤론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월남전 퇴역군인으로 침울한 기분에 젖어 있으니 말이 많을 수가 없다.

할리우드 액션 히어로의 유형을 좀 더 거슬러 살펴보면 '더티 해리' 시리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서부 영화의 스타 존 웨인 같은 배우도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카리스마를 내뿜는 유형의 주인공을 연기했다. '다이 하드'이후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톰 크루즈 등 다른 액션 히어로들도 말보다는 상황에 맞춰 행동하는 주인공들이다. 이렇게 따져보니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브루스 윌리스의 존 맥클레인 형사나 다른 액션 히어로들 모두 비현실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능력을 선보이거나 평범한 인물이 위기 상황에서 겁먹지 않고 말이 많다는 것이 현실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관객들은 이러한 인물과 상황을 비현실적이라고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1999년에 개봉한 '식스 센스'에서 브루스 윌리스와 아역배우 할리 조엘 오스먼트는 엄청난 반전을 선사한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가 현실적인 상황과 인물을 설정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듯 하면서도 비현실적인 환상을 교묘하게 심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관객들이 응원하는 액션 영화의 주인공이 주눅드는 것을 원치 않고 자신감있게 싸워 적을 눌러버리길 바라는 심리를 충족시키는 데 집중한다. 브루스 윌리스든 실베스터 스탤론이든 톰 크루즈든 이 법칙 안에서 연기한다. 그런 점에서 말이 많든 적든 액션 히어로들은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감은 미국에서 어린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점이며 미국 사람들의 몸에 밴 양식으로 미국 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브루스 윌리스의 존 맥클레인 형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말이 많은 것은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표이다. 존 맥클레인의 다변은 겁 먹어서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니며 불평하고 겁 먹은 듯 하지만, 어조만은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맥클레인 형사의 말과 행동은 관객들에게 그가 곧 이 위기를 헤쳐나갈 것이라고 마음을 놓게 하고 그가 곧 멋진 액션으로 상대를 제압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사실, 위기 상황에서 말이 많은 주인공들은 미국 영화에서 흔히 나타난다. 이것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관객들을 환상으로 이끄는 방식이며 미국 영화의 차별화된 특징이기도 하다. 브루스 윌리스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할리우드가 원하는 액션 히어로를 그가 누구보다 더 완벽하고 관객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잘 연기했다는 것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2010년에 개봉한 '레드'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

브루스 윌리스는 1990년대에 '다이 하드'시리즈와 '마지막 보이스카웃', '스트라이킹 디스턴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펄프 픽션' 등 범죄액션 영화와 '12 몽키즈', '제5원소', '아마겟돈', 그리고 M. 나이트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 등을 통해 눈부신 전성기를 보냈다. 2000년대 이후에도 '언브레이커블', '태양의 눈물', '오션스 트웰브', '씬 시티' 등의 작품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그러나 2020년 이후에는 낮은 수준의 영화들에 많이 출연해 비판에 시달렸는데 벌써 이 무렵부터 그의 인지 기능이 낮아지기 시작했는데도 그의 주변 인물들이 그를 악용한 결과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브루스 윌리스는 아카데미상에 가까이 간 적은 거의 없지만, 장르 영화에서 관객들의 성원을 받으며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대스타였다.

브루스 윌리스가 비운의 선배와 동료들의 전철을 밟는 것 같아 애처롭다. 1970년대에 '슈퍼맨' 시리즈로 큰 인기를 얻었던 크리스토퍼 리브(1952~2004)는 불의의 낙마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으로 여생을 보내야 했고 '백 투더 퓨처'시리즈의 스타 마이클 J. 폭스도 파킨슨 병을 장기간 앓으면서 연기 생활에 어려움을 겪다 끝내 은퇴해야 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리브는 전신마비 장애인의 처지를 수긍하며 의연하게 삶을 지속했고 마이클 J. 폭스도 삶을 긍정하는 자세를 잃지 않은 채 파킨슨병 재단을 운영하며 지내고 있다. 브루스 윌리스와 그의 가족들도 결코 용기를 잃지말고 삶을 살아내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