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노라마

전설이 된 강수연의 유작 '정이'(넷플릭스)-미래의 삭막한 초기계문명 속에서 모녀는 서로를 지키려 했다.

노우빅 2023. 1. 23. 00:00

 

영화 '정이'에서 윤서현(강수연)은 죽은 엄마 정이를 전투 A.I.로 부활시키는 프로젝트의 팀장으로 이를 꼭 성공시키려 한다.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강수연과 전도연이 만나 '오픈 토크' 행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전도연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으로 그 해 칸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받았을 때 소감을 전하며 외국 배우들과 영화계 관계자들이 쟤는 누구며 한국에서 어떤 작품들에 출연했느냐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더 당당해져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말했다. 그보다 더한 경험을 갖고 있는 강수연은 전도연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강수연은 전도연의 수상보다 20년 전인 1987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로 여우 주연상을 받았고 2년 뒤인 1989년에는 역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여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가 국제적으로 막 알려지던 때였고 강수연은 국내에서 '월드 스타'로 크게 주목받았지만, 외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의 배우로 알게모르게 설움을 당하곤 했다. 전도연 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선배 강수연의 처지였다.

강수연은 삶의 대부분을 배우로서 살았다. 불과 네 살 때 아역 배우로 영화에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성장기 내내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고 성인이 된 이후인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에는 빛나는 전성기를 보냈다. 많은 작품들에 출연했고 독보적인 여배우로 자리잡았다. 그와 함께한 감독들은 진지하고 근성을 갖춘 배우라며 그녀를 칭찬했다. '씨받이'처럼 옛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도 현대적 발랄함을 내비치는 등 자신만의 해석으로 역할을 소화했다.

정이(김현주)는 자신이 A.I.인 줄도 모르고 시뮬레이션 전투에서 파괴적인 전투력을 보여준다.

강수연은 자신의 뒤를 이어 '월드 스타'로 등극한 전도연 이후 많은 여배우들이 두각을 나타내자 출연 작품을 줄이며 신중하게 고르는 등 이전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최근에 찍은 넷플릭스 영화 '정이'는 2013년작 '주리' 이후 9년 만에 선보인 영화였지만, 영화 완성 이후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유작이 되고 말았다. 최근 윤정희 배우의 마지막 작품에 이어 강수연 배우의 유작을 다루게 됐는데 앞으로 상당 기간 '유작'은 다루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정이'를 살펴보며 고(故) 강수연 배우를 기린다.

 

가까운 미래, 지구가 급격한 기후 변화로 살기 어렵게 되자 지구와 달의 궤도면 사이에 쉘터를 만들어 지구인들이 이주해 살게 된다. 그러나 일부 쉘터가 '아드리안 자치국'을 선언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전쟁이 길게 이어지고 지구에 남은 이들은 지원에 나선다. 한국 출신의 윤정이 팀장(김현주)은 '아드리안 자치국'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두드러진 전공을 세워 유명해지지만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죽음을 맞는다. 정이는 이날 출전하기 전 수술을 앞둔 어린 딸 서현에게 돌아와 곁에 있겠다고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정이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는 이상훈 소장(류경수)은 이상한 유머 감각과 강한 성취 욕구를 지닌 인물로 서현 못지않게 프로젝트의 성공을 꿈꾼다.

A.I. 개발회사 크로노이드는 정이의 뇌를 복제해 강인한 전투력을 지닌 A.I 로봇을 만드는 데에 온 힘을 다한다. 35년 후 정이의 딸 윤서현(강수연)은 '정이 프로젝트'의 연구팀장이 되어 복제를 거듭한 정이로 전투 시뮬레이션 실험을 하는데 최종단계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서현은 어머니가 수술하는 딸에 신경을 쓰다 죽음에 이르렀다고 자책하고 어머니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정이 팀장을 최강의 A.I.로 만드는 데 매달린다. 서현의 뒤에는 이 프로젝트를 전체적으로 이끄는 이상훈 소장(류경수)이 있다. 그는 썰렁한 유머 감각과 강한 성취욕구를 지닌 사람으로 서현 못지않게 '정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바라고 있다.

'정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최종 시뮬레이션을 통과한 정이 A.I.를 아드리안 자치국과의 전투에 투입시켜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서현과 이 소장은 실험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던 어느 날 크로노이드 사의 회장은 아드리안 자치국과 협상하는 방향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는 국면이니 '정이 프로젝트'를 적당히 매듭지으라고 한다.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서현은 크로노이드 본사에서 정이 A.I.에 대한 다른 계획을 추진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여기에 맞선다. 이에 이 소장은 서현과 정이 A.I의 뒤를 쫓으며 공격한다.

 

'정이'가 공개된 후 네티즌들의 평점이 예상보다 낮아 의외였다.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SF장르 영화로 장쾌한 액션 신을 기대했다가 그렇지 못한 데 따른 결과일 수 있겠다. 이 영화는 미래에 극도로 발달한 초기계문명 속에서 모녀 간 애틋한 정을 다룸으로써 잃어버린 인간성 회복을 이야기한다. 연 감독이 "한국적인 SF 장르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전투신은 적고 영화 중반부까지 다소 늘어지는 듯한 흐름이 이어진다.

엄마 정이가 전투에 나가기 전 수술을 받아야 하는 딸 서현을 밝은 모습으로 격려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정이'는 더 높은 평점을 받아야 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우선, 시각적인 표현이 탁월하다. 셀터로 떠나지 못해 남은 지구인들은 기후 변화로 물로 뒤덮인 세상의 우뚝 솟은 건물 안에서 생활하고 지상 고속철로 이동하는데 미래 세상이 저런가 싶게 스크린에 잘 담아냈다. 등장인물들이 일하는 크로노이드사의 내부 모습과 시뮬레이션 공간, 정이 A.I와 다른 전투 로봇과의 시뮬레이션 전투 모습도 꽤 괜찮다. 컴퓨터그래픽과 다른 첨단기술을 이용해 만든 화면일텐데 우리 영화에서 이처럼 세련된 화면을 보는 것이 이제는 제법 익숙하다.

중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갈등과 추격, 전투의 이야기 전개도 나쁘지 않다. 김현주의 연기는 좋고 류경수의 연기는 낯설어 처음에는 좀 어색한데 진행될수록 이해가 가는 캐릭터이다. 강수연 배우는 절제된 연기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감추다가 어느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정이 A.I.를 도우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시청자들의 기대 포인트가 다를 수 있지만, '정이'는 평균작 이상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스트리밍된 지 하루 만에 넷플릭스 영화 부문 세계 1위를 한 데에서 이 영화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사족-강수연 배우가 예전에 했던 인터뷰 자료를 보니 그가 "70이 넘어서도 '집으로...'같은 영화에 나오는 할머니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 내용이 눈에 띈다. '집으로...'는 이정향 감독이 어린 유승호와 김을분 할머니를 등장시켜 만든 2002년 작품으로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네 살때부터 영화에 출연했던 어린 소녀 강수연이 자라서 영화배우로 살고 늙어서도 영화배우로 살고 싶다는 것인데 슬퍼지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신은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대배우를 오래 세상에 둘만큼 너그럽지 않았나보다. 그녀는 이제 전설이 되어 자신이 사랑했던 한국 영화를 하늘에서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