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하려 했으나 헤어져야 했던 특별한 삶, '킹 메이커'(ft.디즈니플러스, 설경구, 이선균, 변성현 감독)
영화를 보고 나서 탁월한 영화인가, 아닌가를 느끼는 여러 기준 중 하나는 '좋은 여운'이 남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탁월한 영화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 그저 어떤 느낌이 드는가를 스스로 점검해보면 된다. 영화 뿐만 아니라 음악, 그림, 연극 등 다른 예술들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음악을 듣고 나서, 그림을 보고 나서, 연극을 보고 나서 어떠한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예술이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작품보다는 관객의 메마른 감성이 걸림돌일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예술 작품을 보고 나서 10명 중 6~7명이 '좋은 여운'을 느낀다면 그 작품은 세상에 나온 보람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성현 감독의 '킹 메이커'(2022년 개봉·디즈니플러스 출시)는 여운이 남는 뛰어난 영화이다. 최근 충무로에서 주목받는 젊은 감독인 변성현은 한국의 추잡한 현대 정치 선거사를 화면에 담아내는데 녹록지 않은 이야기를 솜씨있게 다룬다. 이 영화는 실화와 픽션을 혼합한 것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선거를 도운 천재적 전략가 엄창록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운범(설경구)은 김대중을, 서창대(이선균)는 엄창록을, 김영호(유재명)는 김영삼을, 이한상(이해영)은 이철승을, 강인산(박인환)은 유진산을, 박기수(김종수)는 박정희를, 이진표(조우진) 실장은 이후락을, 김경준(윤경호) 부장은 김형욱을 바탕으로 한 인물들이다.
야당인 신민당 정치인 김운범은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빨갱이'라는 마타도어에 시달리면서도 잘 대처해 이긴다. 이를 지켜본 서창대는 김운범이 군부 출신의 대통령을 대체해 새 세상을 열 인물이라고 여겨 그의 참모가 되기를 원한다. 총선에서 목포 지역구에 출마한 김운범은 대통령까지 지원에 나서는 여당의 총공세에 힘겨움을 겪다가 서창대의 전략으로 승리한다. 서창대는 여당인 공화당이 물품을 나눠주는 부정 선거를 자행하자 신민당 운동원을 공화당 운동원으로 가장해 유권자들로부터 물품을 돌려받는 방법으로 반감을 사게 함으로써 득표율을 높인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김운범은 서창대의 기상천외한 지략에 감탄하지만 그의 전략이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내켜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 서창대는 믿음직하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존재이다. 김운범은 깨끗한 승리를 추구했고 서창대는 더러운 선거판에서 이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서창대는 음지의 참모로 '그림자'로 불리면서 대통령 부하인 김 부장과 이 실장의 회유도 받지만 물리친다. 서창대는 1971년 선거에 나설 야당 대선 후보 경선전에서 김운범을 다시 도우러 나선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김영호와 이한상의 연합 세력에 약세를 보이지만 지방 대의원 표를 샅샅이 훑고 전당대회 당일 2차 결선 투표에서 이한상을 결정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김운범을 대통령 후보로 만든다.
그러나 서창대는 김운범을 대선 후보로 만든 일등 공신이면서도 공화당과의 마타도어 와중에서 오해를 받아 김운범 곁을 떠나게 된다. 대선은 박기수의 장기집권에 지친 유권자들이 김운범을 지지하면서 유리하게 펼쳐지지만 박기수 후보측이 교묘하게 영·호남 간 지역 감정을 일으켜 전세가 뒤바뀐다. 공화당의 비열한 전략 뒤에는 뜻밖에 서창대가 있었다. 서창대는 서운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 실장의 꼬임에 넘어가 박기수의 승리를 이끌지만 그 역시 김운범의 패배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른다.
뛰어난 연기를 했던 아역 배우 출신으로 알려진 변성현 감독은 40대 초반의 젊은 감독으로 이미 '나의 PS 파트너'(2012),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2017)을 만들면서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킹 메이커'에서도 그는 복잡한 선거 이야기를 집중과 선택 전략으로 솜씨있게 처리한다. 부정 선거로 뒤지는 판세를 역공으로 뒤집는 과정은 짧은 화면의 연결로 빠르게 진행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대선 후보가 되는 합종연횡의 과정과 같은 핵심적인 장면들은 등장 인물들의 연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투입한다. 감각적인 연출과 편집 능력을 멋지게 발휘한 것이다.
'킹 메이커'는 부정과 협잡이 판쳤던 한국 현대 선거사의 슬픈 연대기이면서 김운범과 서창대 라는 인물과 그들의 가치관의 부딪힘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창대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만,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추잡한 전략도 마다않는 복합적 인물이다. 여당의 더러운 선거 전략에 맞서기 위해 같이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권모술수를 중시하는 마키아벨리형 인간이다. 김운범은 승리의 과정도 추해서는 안된다는 도덕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어 서창대와 끝내는 결별하게 된다. 김운범이 그런 면에서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진 것은 아쉬운 점이다. 아마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대신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복합적으로 표현하려다 누가 되는 부담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인물들의 갈등에 집중하게 하려면 배우들의 연기력이 좋아야 하는데 설경구, 이선균 등은 그런 면에서 매우 믿음직한 배우들이다.
영화 후반부에 김운범과 서창대가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김운범은 1987년 대선에서 야권 단일화에 실패해 다시 대선에서 졌고 그 1년 후에 서창대와 만난다. 김운범은 쓸쓸하게 미소지으며 "나라도 양보해야 했어"라고 말한다. 세월이 많이 흘러 옛 애증은 내려놓은지 오래인 서창대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옛 일을 돌아보고 근황을 이야기한다. 다시 세월이 흘러 1997년 대선에서 김운범이 승리했다는 뉴스를 서창대는 식당에 앉아 혼자 듣는다. 그 순간, 치열했던 삶은 오래전에 지나갔고 옛 시절에 대한 씁쓸하고 아련한 회한이 밀려온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 닿지 못했던 사내의 삶에 대한 아쉬움이자 존경했던 사람과 멀어져야만 했던 슬픔의 여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