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을 통해 성공하고 가족애를 느끼지만...-넷플릭스 추천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ft.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주연, 힐러리 스웽크, 모건 프리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 할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1930년생인 그는 무려 1955년에 데뷔하여 자그마치 68년간 배우로, 감독으로 촬영장을 누볐다. 그는 구순이 넘은 2021년에도 '라스트 마초'라는 영화를 연출해 극장에 내걸었다. 그는 배우 생활 초기에 서부 영화의 과묵한 주인공을 연기했고 이후에는 유명한 '더티 해리'시리즈의 파괴적인 형사 역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인상적인 액션 배우로 활동하는 와중에 간간이 연출자로 나서 자신이 주연한 작품들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층적인 영화들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그는 인기 라디오 DJ가 광적인 여성 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내용의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년 개봉)를 내놓으면서 감독으로 데뷔,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자신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를 감독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평원의 무법자'(1977), '파이어 폭스'(1983), '승리의 전쟁'(1986)을 감독했고 감독으로만 나서서 '버드'(1988)를 연출해 대부분 찬사를 이끌어냈다. 이어 그는 '용서받지 못한 자'(1993)를 감독·주연 하면서 자신이 주연으로 맡던 이전 서부 영화 주인공들의 전형적 영웅상에서 벗어남으로써 서부 영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 영화에서 윌리엄 머니 역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과거에 무시무시한 악당임을 감추다가 보안관에게 두드려맞고 모욕을 당하다 마침내 무자비한 본성을 드러낸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서부 영화의 권선징악의 주제는 걷어차버리고 누가 악당인지 모를 정도로 처절한 대결을 담아낸다. 이 사실주의적 서부 영화를 계기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고 이후 자신이 감독한 작품들을 바쁘게 내놓는데 하나같이 작품성이 뛰어나 호평을 받았다. 마치 억눌렸던 창작욕을터뜨리는 듯 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앱솔루트 파워'(1997), '스페이스 카우보이'(2000), '미스틱 리버'(2003),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 '아버지의 깃발'(2007), '체인질링'(2009), '그랜 토리노'(2009), '아메리칸 스나이퍼'(2015), '설리:허드슨강의 기적'(2016), '라스트 미션'(2019)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영화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으로서 기량이 농익었을때 내놓은 작품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그와 힐러리 스웽크가 주연한 작품으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자신의 연출 특징을 잘 드러낸다. 캐릭터와 이야기 흐름이 물 흐르듯 하며 과한 연기나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등장 인물들 대부분은 삶의 무게를 느끼며 이들이 즐거워할 일은 별로 없으니 조용히 일상이 흘러가는 가운데 일어나는 변화에 휘말리게 된다. 이처럼 평이하게 영화가 전개되는 듯 한데 영화의 이야기는 어느 사이에 관객들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차분한데 관객들의 감정은 뒤흔들어 버리니 거장의 솜씨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노년의 프랭키 던(클린트 이스트우드)은 권투 체육관을 운영하며 선수들을 육성하는 트레이너이자 경기 도중 상처를 치료하는 컷맨이자 매니저이기도 하다. 그의 곁에는 과거 선수 시절부터 오랜 인연을 맺으며 체육관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친구 에디 스크랩 듀프리스(모건 프리먼)가 함께 한다. 프랭키는 앞날이 창창한 선수 '빅' 윌리 리틀을 키우고 있지만 그는 타이틀전을 빨리 치르고 싶은 욕심 때문에 프랭키 곁을 떠난다. 프랭키는 윌리가 챔피언이 되려면 두 게임 정도 더 하고 타이틀전을 갖는 것이 낫다고 하지만, 윌리는 다른 매니저를 찾아간다.
프랭키는 선수를 아끼는 마음 때문에 이처럼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윌리가 그 마음을 모르고 자신을 떠난 데 대해 서운함이 있지만 프랭키는 별 말 없이 그를 떠나보낸다. 어느 날 체육관에 마거릿 '매기' 피츠제럴드(힐러리 스웽크)가 복싱을 가르쳐달라며 찾아온다. 하지만, 프랭키는 여자는 키우지 않는다며 매몰차게 거절한다. 매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찾아와 연습하고 스크랩이 재능과 열의가 있어 보인다며 프랭키에게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자 프랭키는 마지못해 매기를 받아들인다. 매기는 미주리주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으로 권투로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렬해 맹연습에 돌입한다.
프랭키는 티를 내지 않지만 외로운 인물이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이 과거에 절연하고 떠나자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지만 모두 반송돼 온다. 프랭키는 매기에게 기술만 지도하고 다른 매니저에게 매기를 보내버리지만 그녀가 시합에서 열세를 보이자중간에 지도에 나서 매기를 승리로 이끌고 그녀를 다시 데려온다. 매기는 연전연승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집을 사 어머니와 여동생 가족에게 살라고 권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을 받게 되면 보조금 지원이 중단된다며 오히려 화를 내고 프랭키가 이 모습을 지켜본다. 프랭키는 매기 역시 가족과 불편한 관계였으며 그녀가 어릴 적 여읜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된다.
매기는 유럽 원정 경기에서도 잇따라 승리한다. 프랭키는 매기에게 자신이 즐겨 읽던 책에 나오는 말인 '모쿠슈라'를 새긴 가운을 선물로 주고 관중들은 '모쿠슈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매기를 응원한다. 승승장구하는 매기는 큰 인기를 얻고 드디어 반칙을 서슴지 않는 무시무시한 챔피언 '푸른 곰' 빌리와 백만달러 짜리 타이틀전이 확정된다. 경기가 벌어지고 처음에 밀리던 매기는 매서운 반격을 펼쳐 빌리를 쓰러뜨리는듯 했으나 빌리는 등을 돌리며 방심한 매기를 뒤에서 공격하는 반칙성 주먹을 날려 매기를 다운시킨다. 매기는 쓰러지면서 머리를 의자에 부딪히며 경추를 다쳐 전신불수의 큰 부상을 당한다.
매기는 이제 병상에 누워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평생을 지내야 한다. 매기의 매정한 가족들은 병원에 찾아와 돈 문제만 이야기하다 가 버리고 매기의 곁에는 프랭키와 스크랩만 남는다. 프랭키는 매기를 딸처럼 돌봐주고 매기는 프랭키를 아버지처럼 생각한다. 프랭키는 매기가 알고싶어 했던 '모쿠슈라'의 뜻을 알려주고 매기는 프랭키에게 놀랄 만한 요청을 한다. 프랭키는 매기의 요청을 거절하지만 다시 고민한 끝에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의 열연으로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거머쥔 힐러리 스웽크는 배우 인생의 최고점에 올랐다. 그녀는 어두운 역할을 곧잘 하고 보이시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건강하고 밝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지녔다. 남자 배우로 비교하자면 맷 데이먼 같은 반듯함이 그녀에게서도 느껴진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힐러리 스웽크는 가난하지만, 의욕적이고 사람을 신뢰하는 순수한 여성 복서 역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또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친구 역으로 나오는 모건 프리먼 역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어울리는 탁월한 연기를 보였다. 이 영화에는 나중에 '허트 로커'의 주연급인 샌본 하사 역으로 출연하는 안소니 마키와 드라마 '나르코스' 시리즈에서 좋은 연기를 펼치는 마이클 페냐가 단역으로 나와 재미를 안겨준다.
사족-복싱을 소재로 가족애를 다룬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권투경기 장면은 이 영화의 유일한 아쉬움이다. 영화에서 복싱 경기의 사실적인 모습들을 최대한 표현하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어설픔을 떨치기는 어렵다. 다른 스포츠 종목의 영화도 그렇지만 경기가 펼쳐지는 현실과 영화 화면은 격차가 느껴지기 마련인데 복싱 경기의 격차는 더 크게 보인다. 힐러스 스웽크는 그래도 최선의 노력을 펼쳐 뛰어난 경기 장면들을 연기했다. 복싱 경기의 사실성을 따진다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로키'보다는 좀 더 나아 보인다. 타이틀전에 나서는 힐러리 스웽크의 결연한 모습에서는 고(故) 김득구 선수가 떠올라 슬픔을 느끼게 된다.